강희룡 서예가
강희룡 서예가

조선 중기의 선비이자 재상이었던 유성룡(1542~1607) 선생의 ‘서애집(西厓集), 감사(感事)’에 ‘양을 잃었어도 우리를 고치고/ 말을 잃었어도 마구를 지을지어다./ 지난 일은 비록 어쩔 수 없지만/ 오는 일은 그래도 대처할 수 있으니.’라는 시 한 구절이 보인다. 서애 선생이 임진년(1592)의 왜란을 겪고 난 다음 해 어가를 모시고 도성으로 돌아온 뒤 지은 시의 한 구절이다. 유성룡은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비옥했던 강토를 초토화하게 만든 참혹했던 전화를 회고하면서 임진왜란의 원인과 배경 그리고 자신의 잘못과 조정의 실책 등을 진단하였다. 그중에서도 조정의 대비와 조치가 백약이 무효였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기강이 이미 풀렸으니/ 만 가지 계책 허사로다./ 많은 병사가 시급한 것이 아니라/ 장수 하나 얻기 참으로 어렵구나.’

다시 말해 조정 관료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위정자의 용인(用人)이 실패함으로 인해 왜란을 미연에 방비하지도 초기에 막아내지도 못하여 전 국토가 병화에 휩싸이고, 생령이 도탄에 빠진 것은 물론 임금이 의주까지 몽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어서 다시는 그 같은 전철이 반복되지 않도록 대비해야 한다는 뜻에서 ‘양을 잃고 우리를 고친다.’는 고사를 인용하여 끝맺고 있다. 망양보뢰(亡羊補牢)는 어떤 일을 실패한 뒤에 뉘우쳐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이르는 말로 그 뜻이 변용되어 쓰이기도 하지만, 본래는 어떤 일을 실패한 뒤라도 재빨리 수습하면 그래도 늦지는 않다라는 뜻의 성어이다. 국가든 개인이든 양을 잃기 전에 미리 그 기미를 알아차려 우리를 고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국가의 정책이나 제도, 법령에 관계된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양을 잃은 뒤에라도 우리를 고치는 것이 차선책이라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양을 잃은 원인을 정확하게 진단하는 것이다. 원인에 대한 정확한 진단 없이는 올바른 해결책이 나올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군 검찰의 수사를 받다가 전역식도 제대로 못하고 군을 떠났던 박찬주 예비역 육군대장이 지난달 30일 육군 후배들에게 뒤늦은 전역 인사를 했다. 그는 이른바 ‘공관병 갑질 의혹’ 논란에 휩싸인뒤 수뢰 혐의로 한때 구속됐다가 지난달 26일 항소심에서 뇌물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박 전 사령관은 이날 후배 장교 및 장성들에게 보내는 전역사(轉役辭)에서 ‘네 가지 당부’의 메시지를 보냈다. 첫째로, 군의 정치적 중립. 둘째로, 정치가들이 평화를 외칠 때 전쟁을 준비하는 각오. 셋째로 정치지도자들에게 다양한 군사적 옵션을 제공, 넷째로, 군대의 매력 증진 등의 당부를 남겼다.

간혹 정치인들이 상대편의 선의를 신뢰하더라도 군사지도자들은 그 선의나 ‘설마’를 믿어서는 안 되며 스스로의 능력과 태세를 믿을 수 있도록 대비해야 한다. 힘이 뒷받침되지 않은 평화는 허상이며, 전쟁을 각오하면 오히려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평화를 유도하는 것은 정치의 몫이지만 평화를 지키는 것은 군대의 몫이다. 지금처럼 정치집단이 좌우로 나뉘어져 극도의 혼란이 거듭되는 극한대치상황과 현 정부의 장밋빛 친북정책행보는 국민들의 시선에는 대단히 불안정한 인식으로 비쳐지고 있다. 일 년 전의 판문점선언은 남북관계 발전을 바탕으로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나아가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라는 등식으로 출발했지만, 비핵화를 위한 평화가 아니라 평화를 위한 비핵화 합의라는 성공조건은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퇴역장군의 말대로 군 조직 내에 정치군인들이 활개치고, 정부 스스로 국가방위태세를 허물며 평화의 허상을 쫓는 정책이 지속된다면 국가의 유지조차 어려울지 모른다. 4세기 로마의 군사전략가 베게티우스가 말한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대비하라.’고 한 명언이 생각난다. 퇴역장군의 일침이 가슴 속 깊이 새겨드는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