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규열한동대 교수
장규열 한동대 교수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인간의 문화와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중세의 암흑시대를 건너오고 있었던 유럽인들에게 아직도 문맹률이 95%에 달하였다. 성경을 비롯한 글로 적힌 문건들은 교회와 권력자들에게만 허용되었을 것이니, 보통 사람들이 글을 대할 필요조차 없었을 터이다. 인쇄술은 이후 르네상스 이성의 시대와 계몽의 새벽을 밝힌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성경이 누구에게나 주어졌으며 종교개혁을 통하여 신의 말씀을 직접 읽고 스스로 해석할 수도 있게 되었다. 데카르트가 인간이 ‘생각하므로 존재하는’ 이유를 분명히 했으며 프랜시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하였다. 읽을 수 있어 알게 되었고 더 알게 되므로 생각하게 되었으며 생각을 이어 가면서 문명이 눈부신 궤도에 들어서게 되었다.

지구상에 문맹은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읽을 줄 안다는 것은 쓸 줄도 안다는 것이 아닌가. 모두 읽지만 모두 쓰지는 않는다. 왜 그랬을까. 까닭이 있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매체 즉 미디어가 사용할 수는 있되 주도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보통 사람들을 대신하여 기자, PD, 작가, 감독 등 생각과 이야기, 의견과 생각을 글로 적고 콘텐츠로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개인적인 역량이 출중하기도 했겠지만, 무엇보다 특별한 훈련과 교육, 노력과 경쟁의 산업적 구도와 제약이 있었다. 아무나 기자가 될 수 없고 누구나 언론사 또는 제작사를 경영할 수 없었다. 모두가 공평하게 누려야 할 ‘표현’의 자유는 사실상 많지 않은 전문인들이 누리는 ‘언론’의 자유로 대리되었다.

세상이 다시 바뀌었다. 디지털의 습격은 상상을 넘는다. 가시적으로 늘어난 정보의 양이 우선 놀랍다. 온라인에 없는 게 없고 모든 게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다. 더 이상 공부와 노력이 필요없어 보인다. 읽을 줄 알지만 더 이상 읽지 않는다. 읽지도 않는데 쓸 필요는 이제 정말로 없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누군가 온라인의 바다를 채우고 있기에 저렇게 콘텐츠들이 있을 터이다. 그게 누굴까. 이전의 전문인들 뿐 아니라 이제는 누구나 적을 수 있다. 전할 수 있고 퍼뜨릴 수 있다. 남의 글을 퍼 올리는 게 가능할 뿐 아니라 나의 글을 바로 올릴 수 있다. 세상이 바뀐 또 하나의 대목은 바로 여기가 아닌가. 대신 만족하던 ‘언론의 자유’를 넘어 스스로 충족하는 ‘표현의 자유’가 가능해 졌다. 이를 나는 충분히 사용하고 있는가.

위험은 있다. 글쓰기 훈련이 아직 모자라는가도 싶고 무엇부터 적어야 하는지 막막하기도 하다. 혹 지켜야 하는 무엇이 없는가도 궁금하고 아무나 쓰는 일이 적절한가 의문스럽기도 하다. 가짜뉴스의 위험은 이미 보이고, 시민언론의 가능성이 펼쳐지고는 있다. 15세기 인쇄술이 많은 사람을 긴장하게 했듯이, 21세기 디지털문명은 소통의 지평을 새롭게 열어가고 있다. 그 시절 더 많이 알게 된 용기있는 사람들이 개혁의 시대를 확장했듯이, 이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과 느낌, 이야기와 담론의 단초를 드러내어야 한다. 누군가 나를 대신하여 적어내길 기다리는 일은, 빛의 속도로 변화해 가는 오늘의 흐름에 어울리지 않는다. 어설프고 어색한 표현과 문장들도 거듭 두드리며 시도하노라면 다듬어 지고 나아질 터이다.

인쇄술이 읽기혁명을 가져왔다면 디지털은 쓰기혁명을 당겨주었다. 더 많이 읽는 일이 가능해 졌지만 내 손으로 쓰고 다듬어 세상을 직접 상대하며 소통하는 창문이 넓게 열렸다. 세상과 어떤 글로 나누며 소통할 것인지 오늘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남이 만들어 주는 문명을 여기까지 따라왔다면 이제는 당신이 콘텐츠로 주도하는 세상을 열어주시라. 기회는 당신 손에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