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식특집기획부장
홍성식 특집기획부장

대부분의 가정에서 ‘VHS 테이프’로 영화를 즐기던 때이니 30년 전쯤이다. 골목길과 아파트 단지마다 ‘비디오 대여점’이 1~2개쯤은 있던 시절. 그러나 그곳에서 빌릴 수 있는 영화는 극히 한정적이었다.

주로 미국에서 제작돼 극장에서 인기를 끈 영화를 비디오테이프로 옮긴 건 수십 개씩 진열돼 있었지만, 찾는 이들이 드문 동유럽과 남아메리카의 예술영화는 하나도 발견하기가 힘들었다.

할리우드 영화와 함께 이른바 ‘에로 비디오’가 대여점 매출의 80~90%를 차지하던 시기. 영세 상인들이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돼 있었기에 ‘독특하고 특별한 영화’를 찾는 사람들의 취향은 묵살됐다. 한국에 멀티플렉스가 우후죽순 생겨나고, 언필칭 ‘천만 영화’가 나오기 시작한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영화 배급과 상영에서의 독과점이 보다 심화됐다. 주류 영화가 아닌 피터 그리너웨이, 데이빗 린치, 홍상수의 영화를 보고 싶은 관객들은 여전히 무시와 소외의 대상이었다. 그 무렵 한 시인은 “인구가 5천만인 나라에서 천만 명이 본 영화가 한 해에 3~4편이나 된다는 건 일종의 코미디”라는 말로 이 나라의 ‘영화 편식’을 장탄식했다.

자본은 이익을 기대할 수 없는 곳에 투자의 씨앗을 뿌리지 않는다. 땅을 구입하고 건물을 세워 근사한 인테리어로 장식한 멀티플렉스 영화관. 이걸 만든 대기업들이 ‘돈 되는 영화’만을 상영하고 싶은 욕심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가능하면 다수가 찾는 영화를 많은 스크린에 걸고 거기서 투자한 자본의 반대급부를 얻으려는 걸 비난할 수는 없는 일. 하지만 그건 재벌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문화를 통한 사회적 기여’와는 거리가 먼 행위 아닐까?

최근 또 하나의 ‘천만 영화’가 될 게 명약관화(明若觀火) 한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개봉했다. 수천억 원의 제작비를 투입해 인간의 상상을 현실로 구현해내는 할리우드의 연출력에 영화 한 편당 출연료가 수백억 원에 이르는 인기 배우들이 곳곳에서 출몰하니 기다려온 관객들에겐 근사한 선물 같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해도 너무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상영 점유율이 80%에 육박한다는 소식은 실소를 부른다. 이 정도면 한국 멀티플렉스에선 다른 영화를 선택할 권리가 박탈된 것과 다름없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된 일본 건축가에 관한 다큐멘터리, 미국 정치계의 어두운 그림자에 주목한 영화, ‘세월호 참사’의 기억을 불러내는 작품 등은 아예 스크린을 잡지 못하거나 하루에 1~2번뿐인 상영 시간이 한밤중으로 밀리고 있는 형국.

인구가 1천만 명인 서울에서도 예술영화 개봉관, 독립영화 상영관이 사라지고 있는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자본의 거센 파도 앞에 예술은 무력해 보인다. 겨우 50만이 사는 중소도시 포항에서 “소수의 문화향유권도 보장하라”고 목소리 높이는 건 철없는 아이의 반자본주의적 떼쓰기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양성을 거세한 문화와 예술을 제대로 된 문화·예술이라 부를 수 있을까? 파리 바스티유 광장 인근엔 100석 남짓의 객석을 갖춘 작은 극장이 있다. 3년 전 파리로 출장 갔던 날. 거기서 20세기에 만들어진 흑백 영화를 봤다. 관객이라곤 10여 명이 전부였다. 프랑스 사람들은 ‘돈 되는 영화’를 몰라서, 자본주의에 관해 무지해서 21세기에도 이런 극장을 운영하는 걸까.

“여기만이 아니라 옆 동네에도 옛날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 있다”는 매표소 직원의 말에 프랑스를 왜 ‘문화 강국’이라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모두가 같은 곳을 보며 한 방향으로 달리는 것에 익숙한 한국 사회. 예술의 다양성에 등 돌리고 ‘어벤져스 엔드게임’ 상영관 앞에만 사람들을 줄 세우는 자본과 멀티플렉스에 유감(遺憾)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