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홍 한국은행 포항본부 기획조사팀장
김진홍
한국은행 포항본부 기획조사팀장

2019년 5월 1일은 우리에게는 수많은 일상 중 하루에 불과할 것이다. 굳이 의미를 부여한다면 일부 근로자들은 노동절로서 하루 휴식할 수 있는 날 정도의 감흥뿐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다르다. 새로운 연호(元號)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일본은 1867년 메이지(明治) 이후 일왕(天皇)이 바뀔 때마다 연호가 바뀐다. 이후 다이쇼(大正), 쇼와(昭和)를 거쳐 4월 30일까지는 헤이세이(平成)였다. 이번의 연호 변경은 금년 85세인 일왕이 고령으로 사임하고 황태자인 나루히토(1960년생)가 새로 즉위한 때문이다. 일본 당국은 일본이 국가승인을 하고 있는 195개 각국 정부 등에게 새로운 연호인 레이와(令和)를 영문으로는 ‘Beautiful Harmony’로 로마자표기로는 ‘Reiwa’로 한다는 통지를 마쳤다. 우리에게야 큰 느낌이 없지만 의외로 일본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변화를 촉진시키는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포항은 올해가 시 승격 7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그에 따른 기념행사도 다방면에서 진행되고 있다. 다만 이러한 일상적인 행사들이라도 지역 주민들이 진지하게 귀중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면 그것은 더이상 하나의 행사로 그치지 않게 된다. 그것이 새로운 변화를 촉발시키는 힘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실 포항(浦項)이라는 지명 자체는 비교적 신흥도시여서 경주와 같은 천년 단위의 역사성은 없다. 구한말인 1900년 전후만 하더라도 연일군 북면 포항동(浦項洞)이라는 작은 어촌부락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 포항동이 지금의 50만명이 넘는 지방의 대도시로 성장 발전하기까지는 결과적으로 보면 역사적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는 충격유인이 적어도 4차례는 있었다.

포항동이 포항면, 포항읍 그리고 포항시로 승격하기까지는 물론 해방 이후 지금까지도 포항의 역사는 대체로 20년에서 25년을 주기로 분기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일제강점기시절에 찾아온 제1차 충격으로 포항의 역사적 분기점을 이룬 것은 1923년 4월 12일의 폭풍우였다. 당시 공식인명피해만 하더라도 689명이었는데 이는 당시 포항인구의 9.8%에 이르는 대참사였다. 물론 이를 계기로 포항항 축항과 형산강 개수가 이루어지면서 포항읍은 이후 발전을 거듭하여 1949년 8월 15일 포항시로 승격하게 되었다. 제2차 충격은 27년 후인 1950년의 한국전쟁이었다. 또 다시 전쟁의 폐허에서 포항은 재건에 성공하였다. 그로부터 23년 후 찾아온 제3차 충격은 1973년 포항제철의 제1고로 준공이었다. 당시 인구 6만명에서 32만명의 철강도시 포항으로 대도약을 이루었다. 제4차 충격은 1995년 도농통폐합으로 주변 읍면을 흡수하면서 일약 50만명의 대도시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로부터 20년차인 2015년에는 KTX동해선이 개통되고, 22년차인 2017년에는 포항지진이 발생하였다. 이 두 개의 사건이 제5차 충격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포항에는 어떠한 위기가 다가와도 이를 극복해온 DNA를 갖고 있다. 최근 발생한 두 개 사건 중 KTX개통은 포항을 누구든 드나들 수 있는 개방도시로 만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 포항지진은 얼마 전 특별법 제정 국민청원기간 동안 어려운 전자기기 사용법을 감내한 어르신들까지 합세하며 21만2천675명이 서명을 마쳐 여전히 대결집의 DNA가 존재함을 증명하였다. 이제 도시 포항은 새로운 역사의 흐름을 맞이할 준비가 끝났다. 부디 다양하게 펼쳐질 70주년 행사가 단순한 이벤트에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이번 행사를 통해 시민 각자가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제6차 충격이 오기전까지의 새로운 25년 동안 시민들 스스로 재건해 나갈 또 다른 모습의 포항을 그리면서, 새로운 도약을 위해 각 분야가 각오를 다지는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