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룡 서예가
강희룡 서예가

1392년 7월 17일 문무백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태조 이성계가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500년의 고려가 끝나고, 조선의 새로운 500년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최영 장군과 정몽주 등 즉위식을 치르던 그때 이성계의 머릿속에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이라든가 삶과 죽음으로 엇갈린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열하루 뒤인 7월 28일 새로운 국왕의 즉위를 알리는 교서가 반포되었다. ‘태조실록, 1년 7월 28일’에 ‘문무과 두 과 가운데 어느 하나는 취하고 어느 하나는 버릴 수 없다. (중략) 세 차례의 시험을 통해 합격한 자 33인을 상고해 이조로 보내면 이조에서는 재주를 헤아려 임용하도록 하겠다. 감시(監試)는 폐지한다.’이 즉위교서에는 호포(戶布)감면과 국둔전(國屯田) 폐지 등 민생을 추스르기 위한 개혁안으로부터 충신, 효자, 절부(節婦)의 포상, 즉위식 이전까지 범했던 일반 범죄에 대한 사면령에 이르기까지 총 17항목에 달하는 새로운 국가 건설의 개혁 방안이 담겨 있다. 모든 계층의 현안을 포착하여 민심을 얻으려는 의도가 뚜렷하다고 하겠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첫째 항목은 종묘사직을 바로잡고 고려 왕족을 대우하겠다는 의례적인 것과 다음 항목에 이어진 과거시험의 개혁 방안이었다. 그 세 번째로 문과와 무과 그 어느 하나도 소홀하게 여기지 않겠다는 약속과 중앙과 지방 그 모든 곳에서 인재를 고루 육성하겠다는 의지, 공적 제도(公擧)를 사적 관계(私恩)로 전락시켜 버린 고려왕조의 과거제에 대한 비판 등 이런 일련의 구절은 모두 새 나라를 함께 다스릴 문무 관료들을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에 의해 선발하겠노라는 천명한 정책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관료선발의 공정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시험의 절차를 투명하게 밝히는 것은 물론, 출제의 범위를 사서오경이라는 유가경전으로 특정해 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즉 유교사상이 학문권력으로 바뀌는 시대를 의미하는 것이고 지배층의 대대적인 물갈이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이성계의 즉위식은 단순히 국가 권력이 왕씨에서 이씨로 옮겨간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한반도에서 1천여 년 동안 이어져 온 불교사상의 국가가 유교사상의 국가로 옮겨가는 문명사적 대전환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유교를 바탕으로 한 조선의 문명과 국가로서의 정체성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고 한문이 언문에 국어(國語)의 지위를 넘겨주기까지 강고하게 유지돼 왔다. 이처럼 의미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는 즉위교서는 정도전이 작성한 것으로, 유교정신에 충만한 인물인 정도전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인간의 전범인 동시에 그가 꿈꾸던 새로운 조선의 국가 비전이기도 했다.

오늘날의 우리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국민의 직접선거를 통해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는다. 일부 국회의원은 내각제적 요소가 있는 비례대표라는 정당 득표율을 통해 간접으로 선출된다. 선거를 통해 선택된 대통령과 소속 정당은 임기동안 국민들로부터 국가통치의 권력을 부여받는다. 이러한 제도의 흐름 속에서 좌우로 쪼개진 정치집단은 어느 한 쪽에서 정권을 잡으면 지난 정권의 폄훼와 동시 언론장악을 통해 장기집권을 획책하려는 방법은 이제 일반화됐다. 더 나아가 비례대표를 늘리려는 가장 중요한 선거법 개정까지 당리당략에 따라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에 옭아매려는 발상에 여야충돌로 의원들의 육탄전으로까지 번져 국회가 난장판이 되는 극한국회가 됐다. 이러한 상황을 국민들은 극한이 아니라 ‘극혐국회’로 생각한다. 이렇게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정치집단의 충돌은 정치철학이 취약할 뿐 아니라 당파 싸움으로 심각한 리스크들만 만들기 마련이다. 정치는 국민에게 제시할 아이디어와 해결책, 그리고 국가발전의 전망이 있을 때만이 강력하다. 국가의 현상은 시민현상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국민이 더 훌륭해지지 않는 한 더 좋은 국가나 정치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