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조세프 나투와르 ‘왕립미술원 수업장면’(부분), 1746년. /런던 코톨드 인스티튜트

미술관은 유럽인들의 발명품이다. 유럽에서는 미술관을 뜻하는 ‘뮤지엄’(Museum)이 미술관과 박물관 둘 다를 가리키는데 그 기원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흔히들 뮤지엄의 시작을 ‘분더캄머’(Wunderkammer)에서 찾는다.

분더캄머라하면 독일어에서 온 말인데 개인이 지적 호기심으로 수집한 진귀한 물건들을 모아 진열해둔 방을 뜻한다.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유럽의 귀족들은 남들이 본적이 없는 식물이나 광석 혹은 미술품 등을 서로 경쟁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한다.

예컨대 유럽의 유명한 궁전들을 방문해 보았다면 ‘오랑주리’(Orangerie)라고 불리는 건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독특한 향과 맛을 가져 진귀한 식물로 여겨진 오렌지 나무를 키우기 위해 마련된 일종의 온실이다.

진귀한 물건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은 학식뿐만 아니라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부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뽐내는데 아주 손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에 귀족들은 분더캄머의 규모를 늘리는 것에 열을 올렸다.

엄밀히 말해 분더캄머가 박물관에 가깝다면 지금 식으로 미술 작품을 걸어 두고 보여주기 시작한 미술관의 기원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프랑스의 왕실이었던 루브르가 대중들에게 개방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탈리아의 피렌체가 르네상스를 꽃피웠고, 로마의 교황이 바로크 미술을 이끌었다면, 17세기 베르사유에 궁을 지어 스스로를 태양 왕이라 불렀던 루이 14세의 절대왕정 이후로 프랑스는 유럽 미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루이 14세는 절대왕정을 위한 문화정책을 폈고 그 일환으로 예술가들을 체계적으로 육성하는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그것이 그 유명한 ‘왕립예술원’이다.

왕립예술원은 국가를 위해 봉사할 엘리트 예술가들을 체계적으로 길러내던 공립교육기관으로 미술에만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라 건축과 무용 등 예술 전반을 총망라했던 국립종합예술학교의 성격을 지녔던 곳이다.

프랑스 왕립미술원 로마 분원이 자리한 빌라 메디치.
프랑스 왕립미술원 로마 분원이 자리한 빌라 메디치.

미술 분야에 한정해 왕립예술원이 어떻게 미술을 정치권력 아래에서 철저히 통제했는지 살펴보자.

우선 교수진과 학생 선발 방식에서부터 이미 특정한 미술의 방향성이 정해져 있었다.

이른바 ‘역사화’라고 하는 그림의 특정 장르로 국한되어 있어 제 아무리 그림 솜씨가 뛰어나다 하더라도 역사화를 그리지 않고서는 화가로 성공할 방법이 없었다. 쉽게 말해 역사화는 ‘위대한 사람들의 위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림이다.

성서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그리스 로마의 신화 이야기나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다룰 수도 있다.

누구나 본받아 마땅한 위대한 인물들의 영웅적인 행위가 거대한 크기로 그려져 벽을 장식했다.

왕이나 귀족들은 자신들의 치적을 신화적 소재를 가져와 공공연히 과시하기도 한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듯 미술은 순수한 미적 동기에서 창작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분명한 목적을 위한 도구였던 것이다.

왕립미술원의 교수들은 역사화를 그리던 화가들이었고, 학생들에게는 역사화가로 이름을 날리는 것이 화가로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가브리엘-자끄 드 생토뱅 ‘1779년 살롱전 전경’. 18세기 후반, 종이에 유채, 20 x 44cm.  /루브르 박물관
가브리엘-자끄 드 생토뱅 ‘1779년 살롱전 전경’. 18세기 후반, 종이에 유채, 20 x 44cm. /루브르 박물관

회화의 다른 장르인 정물화나 풍경화를 그려서는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웠던 게 당시의 냉혹한 현실이었다.

프랑스는 미술의 선진지였던 로마에 궁을 매입해 왕립미술원 로마 분교를 설립한다. 초대 원장을 지낸 인물이 프랑스 고전주의 바로크 미술을 확립한 니콜라 푸생이다.

왕립미술원은 해마다 공모를 통해 가장 우수한 학생 한 명을 선발한 후 로마 분교로 유학을 보내 3년에서 5년 동안 고대 문물을 직접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로마 대상’(Prix de Rome)이라고 불렸던 이 상을 받는 것은 미술가로 성공할 수 있는 첫 번째 공식적인 관문이었기 때문에 경쟁도 치열했고 심사도 엄격했다. 물론 최우수작 선발이 항상 투명하고 공평했던 것은 아니다.

로마대상이 탁월한 학생을 엘리트로 키우기 위한 교육정책이었다면 본격적으로 이름을 걸고 화가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살롱전’이라는 또 다른 관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왕립미술원은 루이 14세의 명을 받아 정기적으로 대규모 전시회를 개최하게 되는데 이 전시회가 나중에 루브르의 ‘살롱 카레’에서 열리게 되면서 살롱전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2, 3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개최된 대규모 전시인데 살롱전에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서 화가들은 역시나 역사화를 그려야만 했다.

살롱전은 최초로 개최된 근대적 형태의 전시회라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살롱전이 있기 이전에 미술작품들은 대부분 개인의 저택을 장식했었다. 혹은 종교화라면 교회 건축이나 제단을 장식하며 종교적 기능을 수행했다.

그러던 미술이 순수하게 감상의 목적으로 개최된 것이 바로 살롱전에서부터이다.

살롱전이 열리는 기간이면 파리 전체가 축제 분위기로 들뜨게 된다. 미술하면 귀족들의 전유물이겠거니 지래 짐작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프란스 프랑켄 ‘쿤스트캄머’. 1636년, 나무에 유채, 86.5 x 120cm.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소장
프란스 프랑켄 ‘쿤스트캄머’. 1636년, 나무에 유채, 86.5 x 120cm.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소장

물론 경제적 효용성이 없는 값비싼 미술작품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특정 계층에 국한되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살롱전이 열리면 왕궁이 모두에게 개방되었다.

사회적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미술에 대한 조예가 있건 없건 관계없이 모두가 살롱전이 열리는 루브르를 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책적으로 역사화를 장려했던 것은 왕의 업적을 찬양함과 동시에 왕과 국가를 향한 민중의 충성심을 고양할 목적이 있었던 만큼 왕궁의 문을 활짝 열었던 것은 당연하게 보인다.

살롱전이 도시 전체의 축제였던 만큼 그와 얽힌 에피소드들도 적잖이 생겨났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몰려들었으니 소매치기들이 들끓었고, 그림보다는 어여쁜 아낙들을 감상하기 위해 눈이 바빴던 남정네들도 한 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미술전시의 초기 형태이다 보니 기술적으로 아주 허술해 보인다. 좁지 않은 전시공간이지만 수 백 점의 작품들을 동시에 걸어야 하니 바닥에서 천정까지 온 벽면이 빼곡히 그림으로 채워졌다.

요즘처럼 쾌적한 감상을 위해 작품과 작품, 작품과 감상자 간의 최소한의 거리를 확보해야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작품들을 주제나 화풍에 따라 분류하여 전시할 수 있다는 관념은 아예 존재하지를 않았다.

어떻게 보면 전시라기보다는 벽의 빈 공간들을 그림으로 채운 수준에 불과하다.

살롱전의 전시 방식이나 내용이 지금의 전시와는 상당한 거리를 보이지만 이를 통해 미술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현상들이 함께 발생했다는 것은 반드시 언급될 수밖에 없다.

우선 전시도록이라는 것이 출현했다. 작품들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보니 누구의 어떤 작품이 어디에 걸려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혹은 벽에 걸려 있는 어떤 작품이 누구의 그림이며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살롱전으로 생겨난 또 다른 현상은 ‘미술비평’이다.

살롱전 출품작들을 감상하고 자신들이 보고 느낀 것을 통해 비판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주제를 표현하는 방식에 대해 평가를 하고 색채 사용과 인물 묘사에 대한 판단이 내려졌다. 문헌적으로 가장 처음으로 이루어진 미술비평가들 중에 백과사전을 편찬한 디드로의 이름도 등장한다.

이렇게 시작된 미술관과 미술전시가 이제는 진화를 거듭해 단순히 작품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콘텐츠를 생산해 내는 창작의 장이 되었다.

미술의 형식이 달라지면서 미술관의 형태도 달라졌고, 미술의 내용이 달라지면서 전시의 방식도 달라지게 된 것이다.

/김석모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