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재발견
소설가 김별아의 신라정신의 원류와 본질을 찾아서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 가운데 유일하게 천도(遷都)가 없었던 신라의 수도 서라벌. 사진 앞쪽이 서라벌의 왕궁터인 월성이다, 가운데 왼쪽부터 현재의 교촌한옥마을과 계림, 첨성대, 동궁과 월지, 황룡사지가 보이고, 뒤쪽으로 경주 시가지가 자리하고 있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도무지 불혹(不惑)할 것 같지 않았던 미혹(迷惑)의 마흔에 문득 “지금껏 피하고 꺼리던 일을 해보자”며 백두대간 종주에 도전했다. 청계산과 관악산에 둘러싸여 이십 년을 살고도 단 한 번 스스로 산행을 결심해 본 적 없는 ‘평지형 인간’ 주제에 첫걸음이 백두대간이라니! 첫 번째 산행 길에 일찌감치 깨달았다.

“이건, 미친 짓이다!”

내 발등을 내가 찍었다는 후회를 수십 수백 번 곱씹으면서, 2년 동안 지리산 천왕봉부터 진부령까지의 백두대간 남한 구간을 완주하고야 말았다. 지금 돌이켜 봐도 참으로 미련하고 무모한 짓이었을 뿐더러 일생에 다시 못할 뿌듯하고 용감한 일이었다.

그때 얻은 족저근막염과 무릎 통증으로 지금은 험산이나 오랜 시간 산행을 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더 이상은 오르기 전부터 두려움에 떨지 않는다. 산은 글자부터 속성까지 삶을 닮았다. 결국, 삶은 두려워하지 않는 자의 것이다.

2차 산행은 전북 남원 운봉읍에서 시작해 통안재에서 사치재를 넘어 복성이재에서 마루금이 끝나는 총 16㎞의 코스였다. 재로 이어지는 구간인지라 산보다는 완만했지만 그때만 해도 울트라 왕초보 산객이었던 내게 힘들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날 사치재에서 북진하다 781m봉을 지나 복성이재로 이어진 길에서 이끼 낀 커다란 돌무더기로 남아있는 아막산성을 만났다. 아막산성은 백제와 신라가 주도권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다.

백제 무왕은 즉위 3년(602·진평왕 24년)에 신라의 아막산성을 공격했는데, 그 전투에서 백제군이 평상시에 유지하는 전체 병력 6만 중 3분의 2에 달하는 4만을 상실하는 대패를 당했다고 한다. 승리한 신라군 역시 귀산과 추항이라는 장수를 잃었다. 잠시 스틱을 내려놓고 장갑과 무릎 보호대를 벗은 뒤 석벽에 기대어 쉬노라니 당시 그 무섭다는 중2였던 아들아이와 친구들이 엉두덜거렸다.

“그냥 산만 타도 이렇게 힘든데, 어쩌자고 여기까지 기어 올라와서 싸움질을 한단 말이야?”

아무래도 4만이 전사할 정도의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엔 비좁고 가파르다. 해발 680m 지점에 2m 이상의 성벽을 쌓으려면 고생이 만만찮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인들은 필사적으로 성을 쌓고 목숨으로 고개를 지켰다.

이때의 정세를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 ‘삼국사기’에 나오는 견아(犬牙), 개의 이빨이라는 뜻이다.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가 ‘개 이빨처럼 서로 맞물려 있던’ 시절, 그 돌무더기 고개가 바로 피가 흐르고 불꽃이 솟는 승리와 패배의 격전지였던 것이다.

실로 고대사는 먼 하늘의 달무리처럼 흐리마리하다. 남아있는 금석문은 많지 않고 문헌은 혼돈스러우며 유물유적은 외세에 약탈당했거나 전란에 소실되었다. 게다가 고구려의 땅인 북쪽과 신라와 백제의 땅인 남쪽이 분단되어 학문적 교류마저 단절된 채 세월을 흘려보냈다.

그나마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현대 장비를 이용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조금씩 비밀의 실마리가 풀리고 있어 다행이다.

여전히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지만 이런 수수께끼라면 얼마든지 즐겁다. 좀 더 호기심과 인내심을 발휘해야 마땅하다.

‘삼국시대 고고학개론1-도성과 토목 편’(대한문화재연구원·2014)을 살펴보면 삼국의 도성 조영이 각 나라의 흥망을 좌우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왕도 서라벌은 건국부터 패망까지 전 시기를, 왕성 월성은 101년부터 935년까지 834년 동안 50대의 왕을 거치며 건재했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의 사정은 신라와 달랐다.

고구려는 3번에 걸쳐 도성을 옮겼다. 환인 지역 졸본에서 압록강 가 국내성으로, 그리고 다시 대동강 유역 평양으로 천도했다(평양에서도 처음에는 시가지 동북쪽에 머물다가 586년 현재 평양 시가지에 자리 잡았다). 백제는 크게 한성에서 웅진(공주)로, 웅진에서 사비(부여)로 이동했다. 한성에서도 처음에 한강 이북 하북위례성에 있다가 온조왕 때 한강이남 하남위례성으로 옮겼고, 근초고왕 때 한산(漢山=한성)으로 이도했다고 추정된다.

구글(Goole) 이미지에서 ‘우뉘산(Wun Mountain)’을 검색하면 가히 신비롭다 할 만한 풍경과 만날 수 있다. 해발 8백여m의 산 정상에 1백m가 넘는 수직 절벽이 깎아지른 듯 솟구쳤고, 그 위에 거짓말처럼 성터가 있다. 바로 고구려의 첫 번째 왕성으로 비정되는 오녀산성이다.

고려 후기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전집’ ‘동명왕편’에 “7월에 검은 구름이 골령에 일어나서 사람들이 그 산은 보지 못하고 오직 수천 명 사람의 소리가 토목 공사를 하는 것같이 들렸다. 왕이, 하늘이 나를 위하여 성을 쌓는 것이다, 하였다. 7일 만에 운무가 걷히니 성곽과 궁실 누대가 저절로 이루어졌다. 왕이 황천께 절하여 감사하고 나아가 살았다.”는 대목이 절로 떠오른다.

고구려 시조 주몽이 건국 직후 골령에 성곽과 궁실을 조영했다는 사실은 ‘광개토대왕비’를 통해서도 확인되는데, 과연 하늘의 도움을 받는 영웅이 정치적 권위를 과시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웅장한 풍경이다.

하지만 중국이 관광지로 조성해 개방한 오녀산성 내부를 들여다보면 일상적으로 거주하기에는 쉽지 않은 조건임을 확인할 수 있다.

차마가 다닐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십팔판은 938m의 끝없는 돌계단으로, 정상까지 열여덟 굽이를 건너야하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산상(골령) 성곽인 오녀산성을 의례 공간이나 군사방어성으로, 평상시 거주한 홀본(졸본)은 오녀산성 바로 동쪽의 혼강 연안에 위치했다고 본다(여호규). 다만 이 지역은 환인댐 수몰지구로 물속에 잠겨 있어 유물유적을 확인하기 어렵다.

고구려의 도성은 이후 국내성과 평양으로 천도하고도 졸본에서처럼 이중구조를 보인다. 평상시와 비상시가 분리된 구조는 결국 전쟁에 대비한 것이다. 고구려는 삼국 중에서도 가장 많은 전투를 치른 나라다. 북으로 부여, 거란, 전연, 북위, 수, 당 등의 대륙 세력들과 갈등하면서 수도가 국내성에서 평양까지 남진했으며 이후 백제, 신라와 맞섰다. 전쟁 같은 삶, 삶의 전쟁. 고구려의 수도가 여러 번 바뀐 데에는 절박한 대내외적 요구가 있었다.

백제도 마찬가지였다. 한성 백제의 도성은 평상시의 풍납토성(북성)과 비상시의 몽촌토성(남성)이 정궁-별궁 양궁성제로 운영되고, 인근에 왕릉구역(석촌동-가락동고분군)이 위치하며 그 외곽에 일반 취락(하남미사동유적, 서울암사동유적 등), 산성 등이 분포하는 양상이었을 것이라고 본다(김낙중). 고구려의 한성 함락으로 백제는 갑작스럽게 웅진으로 천도하고, 웅진기 도성도 왕궁 위치, 축조 시기, 나성의 존재 여부, 도성 내부 등등이 논란 중이지만 일단 웅진성은 현재의 공산성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에게 밀리고 신라에게 치이며 백제는 필사의 발버둥을 한다. 백제의 마지막 도성인 부여 사비성은 이런 절박함을 드러낸다.

사비도성은 부소산성과 이곳에서 연결되는 나성으로 둘러싸여 있다. 즉 도성을 두르는 나성과 청마산성 등의 외곽 방어시설이 사방에 포진된 형태다. 경주에는 나성이 없다. 대신 사방에 산성이 배치되어 있어 도성을 방비하는 방어시설의 기능을 한다.

부소산성의 내부 시설은 조사가 미흡하고 나성 또한 마찬가지다. 부소산성은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22세기를 위해 보전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되었고 낙화암의 일출 또한 그토록 장관이라지만, 낙화암의 본래 이름이 떨어질 타의 타사암(墮死巖)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스산한 기분이 든다. 부여 또한 더 많은 이야기가 묻혀 있는 땅이다.

주몽의 고구려 건국신화를 간직한 중국 랴오닝성 오녀산성의 모습. 높은 산 위에 우뚝 솟은 바위산이 한눈에도 천혜의 요새임을 알 수 있다. 사진에 보이는 바위산은 남·북 방향으로 약 1km이고, 동서 너비는 약 300m이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주몽의 고구려 건국신화를 간직한 중국 랴오닝성 오녀산성의 모습. 높은 산 위에 우뚝 솟은 바위산이 한눈에도 천혜의 요새임을 알 수 있다. 사진에 보이는 바위산은 남·북 방향으로 약 1km이고, 동서 너비는 약 300m이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고구려와 백제의 도읍지 변천과 도성의 형태를 살펴보노라니 월성의 존재가 더욱 유의미하다. 신라는 삼국 가운데 유일하게 천도(遷都)가 없었던 나라다. 후발 주자로 척박한 지역에 터를 잡았지만 먼저 건국한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외부 세력과의 갈등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고구려의 고국원왕이나 보장왕, 백제의 개로왕과 책계왕과 침류왕과 성왕처럼 전쟁터에서 전사한 왕도 없다. 정복전쟁의 격전장에서 사령관과 근거지를 잃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승기를 잡을 조건이 충분했다.

‘삼국사기’에는 689년 신문왕이 “도읍을 달구벌(대구)로 옮기고자 하였으나 실현하지 못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하지만 그것은 달구벌의 새로운 세력을 통해 서라벌의 진골 귀족 세력을 견제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이지 외부의 압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도읍을 옮기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일인가? 현재도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신도시 건설만 생각해 봐도 후보지가 결정되면 토지 수용부터 인프라 조성까지 쉬운 일이 하나도 없다. 기득권 세력의 저항은 물론이거니와 전부터 살던 주민들의 반발과 강제 이주에 따른 갈등도 만만찮다. 낯선 곳에 적응하고 뿌리를 내리기까지의 스트레스와 시행착오는 또 어떤가?

신라는 이런 과정에서 소모되는 에너지가 없었다. 그래서 에너지를 비축해 또 다른 곳에 쓸 수 있었다. 월성은 5세기 후반 성벽 축성한 뒤 삼한 통합을 기점으로 궁궐을 대대적으로 개보수와 궁역을 확장한다. 왕궁을 중심으로 왕경은 점점 넓어진다. 도로가 정비되고 재개발과 신축이 차근차근 진행된다. 서라벌이 계획도시로 조성된 것은 6세기 중엽 진흥왕 때부터이며, 신라 도성이 가장 확장된 시기는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홍보식).

‘개의 이빨’의 시기를 지나며 서라벌을 중심으로 외곽으로 확장하는 방어체계를 구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영토 확장에 따라 방어체계는 여러 겹으로 확대되었고, 성곽의 경우 점차 규모가 커졌으며, 하천이 교차하는 핵심 거점에는 성벽 규모가 큰 성을 구축했다(조효식).

새로운 도시의 건설은 인구 증가와 토목 기술 발달의 증거일 뿐더러 왕권강화를 위한 정치적 행위이기도 했다. 천년 도읍 서라벌과 천년 왕성 월성은 신라의 터전이고 국력이었으며, 신라 그 자체였다. 깊은 강은 멀리, 그리고 오래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