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보면 한국은 가까우면서도 멀다. 비행기에 실려, 버스에 실려 왔다 갔다 삼박사일. 상하이에서 항조우로, 그리고 다시 소흥으로.

삼일운동 백주년이라고, 삼박사일 학술대회 겸 견학을 온 것이다. 상하이와 항조우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옛 건물이 남아 있고, 소흥에는 루쉰의 자취가 남아 있다 한다. 이쪽으로 건너오기 전에 임시정부 백 주년 기념 원탁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삼일운동은 운동이 아니라 삼일혁명이요, 왜냐하면 바로 이 의거를 통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태동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상하이의 임시정부 선언 날은 1919년 4월 11일, 삼일혁명 한 달 남짓한 때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삼 개월 계속된 이 혁명에 이백만 명이 참여하여 7천500여 명이 살해당하고 1만6천여 명 부상, 경찰에 검거된 사람이 4만6천여 명, 검찰에 송치된 사람이 1만 9천54명, 이중 유죄판결 받은 이가 7천819명이었다고 한다. 이 혁명이 있고서야 혁명의 힘으로 임시정부는 태동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대한제국식 임시정부 아니라 민주공화제를 표방한 ‘급진’ 정부를 말이다.

새벽 네 시에 눈떠 인천공항에 여섯 시까지 가서 수속, 비행기 탑승 후 삼십 분 넘게 기다리다 한시간 사십 분 비행, 단체비자로 수속 밟고 나가 바로 임시정부 청사로. 또 버스 타고 세 시간 가까이 달려 항조우 임시정부 기념관으로.

숨가쁜 첫날 일정이건만 마음은 더없이 숙연해진다. 그분들은 1910년 전후로 한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 신민회를 결성, 투쟁하다 해외로들 망명 삼일혁명의 투쟁을 계기로 응집된 정부를 세웠던 것이다. 상해, 항주, 진강, 장사, 광주, 유주, 기강, 중경. 거듭되는 일제의 암살, 체포 기도를 헤치고 그분들은 대한민국의 기치를 내릴 수 없었고, 쫓기면서도 버티며 공격하고, 반격을 준비할 수 있었다. 둘째 날은 아침 여덟시부터 저녁 여섯시까지 하루종일 세미나다. 사회를 보고 발표도, 토론도 한다. 전원발표, 전원 토론이다.

삼일운동을 전후로 하여 김동인, 염상섭, 이광수 세 사람은 각기 자신들의 방식으로 싸웠다. 김동인은 순문예지 ‘창조’를 펴내고 히비야 공원의 2·8 독립선언에도 참가, 3·1 운동때는 평양에서 동생이 돌리는 격문을 써주고 3개월이나 옥살이를 했다. 염상섭은 혼자서 재 오사카 조선인 노동자 대표를 자처하며 독립선언을 했다. 이광수는 2·8 독립선언서를 쓰고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참여, 기관지 ‘독립’의 창간으로 나아갔다.

이광수는, 김윤식 선생은 말씀하시기를, 고아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고 한다. 열한 살에 양친을 모두 잃은 육신의 고아요. 메이지중학을 졸업하던 해에 나라를 잃은 조국 상실의 고아였다는 것이다. 선생은 1969~1970, 1980년 등 두 차례에 걸쳐 일본에 가 자료를 섭렵, ‘이광수와 그의 시대’를 쓰셨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는 이광수의 일본 체험, 일본 사상과 일본을 통한 서양 사상의 접촉들이 잘 그려져 있다. 다만 모든 일에는 득이 있으면 실도 있다. 일본 근대가 이광수 문학에서 크게 부각되면서 이광수는 사상의 고아로, 그리하여 자신의 친아비와 형의 사상 대신에 ‘털빛깔’(정지용, ‘백록담’) 다른 의붓아비, 양부의 사상을 배육한 존재로 묘사된 점이 없지 않다.

셋째 날은 루쉰의 고향 소흥으로 갔다. 18년산 소흥주가 달아 초두부 썩는 내음을 참을 수 있었다. 마지막 날 우리는 또 여섯 시에 길을 나서 ‘고국’으로 향한다.

그분들의 희생이 없었던들 어떻게 오늘의 우리가 있으랴.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