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의 경북의 멋과 맛을 찾아서
제사·손님맞이·잔치 외엔 쓰지 못했던 백미

열 살 무렵, 시골에 살았다. 어느 날 이웃집에 놀러 갔다. ‘계란밥’이 나왔다. 쌀 조금에 보리쌀과 좁쌀을 잔뜩 넣은, 가난한 집의 식사였다.

노란 좁쌀이 달걀과 비슷한 색깔이었다. 그 후 오랫동안 ‘계란밥’ 타령을 했다. 그나마 밥은 먹고 살 정도의 중농. 할머니는 철없는 손자의 ‘계란밥’ 타령을 듣다못해 말씀하셨다. “쟈, 저러다 병나겠다. 고마, 계란밥인지, 좁쌀밥인지 해조라.”

그로부터 몇 번 ‘계란밥’을 먹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오래지 않아 그게 달걀이 아니라 좁쌀이라는 사실은 알아차렸다. 밥그릇에 담긴 작고 노란 좁쌀 알갱이. 당연히 좁쌀이 어떤 의미를 지닌 지도 몰랐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 중국에서 샤오미[小米, 소미]라는 회사가 나올 줄은 짐작도 못 했다.

◇ 쌀을 먹은 역사? 그리 오래지 않았다

이밥에 고깃국? 북한이 김일성 시대부터 내걸었던,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구호다. 쌀밥 한번 마음껏 먹어보자. 만만치 않다.

우리 ‘쌀밥 역사’도 그리 길진 않다. 수탈의 일제강점기에는 언감생심 힘들었다. 한국전쟁 후에는 전쟁의 상처로 먹고살기 힘들었다. 1970년대 혼식과 분식의 시대를 지났다. 힘들었던 시절, 정부는 아이들의 도시락까지 검사했다. ‘식량 자급자족’은 쌀밥을 원하는 대로 마음껏 먹어보자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쌀밥 마음껏’을 이루었고 북한은 실패했다.

그 이전, 조선 시대에는 가능했을까? 당연히 불가능했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4년(1458년) 6월26일의 기사다. 제목은 ‘도승지 조석문, 우승지 한계미에게 제향 외에는 갱미를 쓰도록 명하다’이다.

 

이제는 보기 힘들어진 냄비밥. 가난한 시절의 냄비밥은 추억이 됐다.
이제는 보기 힘들어진 냄비밥. 가난한 시절의 냄비밥은 추억이 됐다.

임금이 도승지 조석문, 우승지 한계미에게 이르기를, “내가 항상 스스로 검약하여서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넉넉하고 유족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모든 음식을 조금도 검찰하지 않으니, 반미(飯米)는 지극히 정(精)하고 지극히 희게 할 필요가 없다. 금후로는 제향(祭享) 이외에는 세갱미(細粳米)를 쓰지 말게 하고, 대개 중미(中米)를 쓰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조석문이 대답하기를, “중미는 지극히 거칠으니 진공(進供)하기에 마땅치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갱미(粳米)를 쓰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세갱미〉갱미〉중미’ 순서다. 중미보다 더 거친 쌀은 ‘조미(<7CD9>米)’다. 말 그대로 아주 거친 쌀이다. 조선 건국 후 60년이 지났을 시점이다. 나라도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세조는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절대군주다. ‘반미(飯米)’는 밥쌀이다. 절대군주가 먹는 밥상의 쌀을 반쯤 쓿은 것으로 사용하라는 명령이다. 지금의 현미보다 덜 쓿은, 거친 쌀이었을 것이다. 세갱미는 완전히 쓿은 쌀이다. 오늘날의 백미(白米)와 흡사한 것으로 추정한다.

역시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이다. ‘제향(祭享)’은 제사와 잔치다. 제사 모시는 일과 손님맞이 잔치 이외에는 귀한 백미를 쓰지 말라는 지시다. 임금도 일상적으로 백미를 먹기 힘들었다.

조선 시대, ‘쌀’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쌀[米]과는 다르다. 쌀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지금 우리가 먹는 쌀은 대미(大米)다. ‘소미(小米)’도 있다. 좁쌀이다. 좁쌀도 쌀이다.

쌀만 일용하는 곡식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 메밀도 일상적인 ‘밥의 재료’ 곡물이었다. 메밀을 구황작물로 여기지만 그렇지는 않다. 메밀은 흉년에 먹는 구황작물이면서, 일상적으로 재배하고, 식량으로 삼았던, 중요한 곡식 중의 하나였다. ‘메밀 쌀’도 있었다.

곡식은 두 종류로 나누었다.

정곡(正穀)과 잡곡(雜穀)이다. 사전에는 “쌀, 찹쌀 이외에는 모두 잡곡”이라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의 ‘경세유표_제12권_지관수제_창름지저3’의 일부다. 정곡과 잡곡의 종류, 곡식의 종류를 정확하게 기록했다.

정곡 여섯 가지는, 첫째 대미(大米: 즉, 볍쌀), 둘째 소미(小米: 즉, 좁쌀), 셋째 벼(租: 즉, 稻), 넷째 조(粟: 즉, 稷), 다섯째 대맥(大麥), 여섯째 대두(大豆)이다(벼 중에는 혹 산도(山稻)라는 것이 있고, 조 중에는 혹 늦차조가 있음).

 

이밥에 고깃국은 옛날 사람들의 소박하면서도 큰 소망이었다.
이밥에 고깃국은 옛날 사람들의 소박하면서도 큰 소망이었다.

잡곡 여섯 가지는, 첫째 패자(稗子: 吏文에는 잘못 稷이라 함), 둘째 수수(<85A5>黍: 이문에는 그릇 唐이라 함), 셋째 귀밀[雀麥: 이문은 그릇 耳牟라 함], 넷째 메밀[蕎麥: 이문에는 잘못 木麥이라 함], 다섯째 소맥(小麥: 이문에는 그릇 眞麥이라 함), 여섯째 소두(小豆: 녹두는 진제(賑濟)와 군량 양쪽에 마땅한 데가 없으니 그 이름을 열두 가지 중에서 없앰이 마땅함)이다.

정곡은 대미(쌀), 소미(좁쌀), 벼(예전 멥쌀), 조[粟, 속, 기장으로 추정], 대맥(보리), 대두(콩) 등이다.

잡곡은, 패자(피), 촉서(수수). 귀밀(귀보리), 교맥(메밀), 소맥(밀), 소두(팥) 등이다. 녹두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진제(구휼 정책)와 군량 양쪽에 모두 큰 쓰임이 없다.

쌀과 더불어 좁쌀, 메밀 쌀, 기장, 보리 등을 널리 ‘쌀’로 사용했다.

다산 정약용의 시대, 즉 정조대왕이 통치하던 18세기 후반은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다. 비교적 안정적이고 넉넉하던 시절이다. 이 시대에도 ‘이밥에 고깃국’은 여전히 힘들었다. 쌀 대신에, 오늘날 우리가 잡곡으로 여기는, 보리, 좁쌀, 기장, 콩 등을 밥 짓는 곡물로 사용했다. 쌀만 쌀이 아니라, 여러 잡곡도 쌀로 여겼다.

◇ 우리는 무엇을 먹고살았을까?

우리 선조들이 한반도에 산 것은 5천 년이다. 역사를 글로 기록한, ‘유사시대’는 2천 년에 미치지 않는다. 긴 세월 동안 우리 선조들은 무엇을 먹고살았을까? 쌀보다는 잡곡이다. 한반도의 역사는 ‘잡곡 대신 쌀’의 역사다. 남쪽과 달리, 추운 날씨의 한반도 북쪽은 쌀 생산이 불가능했다.

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표8권_지관수제_전제(田制) 10’의 내용이다.

촌감(村監) 한 자리는 곧 옛날 전준(田畯)의 직(職)이다. 그 해가 다 가도록 수고하는데, 녹(祿)이 없을 수 없으니 1년에 곡식 24곡(斛, 240두)을 받아서 양식으로 하며, (중략) 남방에는 벼, 북방에는 메기장을 준다

촌감, 전준 모두 현장에서 농사를 관리하는 권농관이다. 급료를 준다. “남쪽에서는 벼(?), 북쪽에서는 메기장”이다. 원문에는 “南方以稻 北方以稷(남방이도 북방이직)”으로 표기했다. 남과 북에서 지급하는 급료의 내용물이 다르다.

‘도(稻)’는 탈곡하지 않은 벼, ‘직(稷)’은 탈곡하지 않은 기장이다. ‘도’는 지금은 잡초로 여기는 ‘피’, 예전 멥쌀이나 볏과의 식물로 여기기도 한다. ‘직’도 마찬가지. 기장 혹은 볏과의 어떤 식물로 추정한다.

‘도’와 ‘직’ 모두, 우리가 먹는, 쌀이 아니다. 재미있는 것은 급료의 내용물은 다르지만, 양은 같다. 240말이다. 도와 직을 나누지 않았다.

우리만 곡물, 잡곡을 먹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조선 중기 문신 남용익(1628~1692년)은 효종 6년(1655년), 조선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문견별록’을 남겼다.

 

추수가 한창인 포항 들녘. 쌀은 자포니카 종과 인디카 종 두 종류다.
추수가 한창인 포항 들녘. 쌀은 자포니카 종과 인디카 종 두 종류다.

“(전략) 음식은 반드시 젓가락으로 먹으며, 빈부귀천 할 것 없이 하루 두 끼 ‘밥’을 먹고 힘든 일을 하는 자라야 세 끼를 먹음. 가난한 사람으로서 역사(役事, 힘든 일)를 하는 자는 밥을 두서너 숟갈을 뭉쳐 한 덩이로 만들어 불에 쬐어 말려서 먹되 하루 두 덩이를 먹었으면 다시는 더 밥을 먹지 않으며, 심한 자는 더러 찐 떡만 먹거나 군고구마만 먹기도 하여, 아무리 큰 도성이나 큰 읍(邑)이라 하여도 솥밥을 먹는 집이 드물다. (후략)”

이 글의 ‘밥’은 우리가 생각하는 쌀로 지은 ‘밥’이 아니다. 정확지는 않지만 ‘어떤 곡물’을 찐 것이다.

원문에는 ‘반(飯)’이라고 표기했다.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밥’이 반드시 쌀은 아니다.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어떤 곡물이다. 글의 끝부분에 “솥밥을 먹는 집이 드물다”라고 했다. 솥밥은, 오늘날과 같이 쌀 혹은 보리 등으로 지은 밥을 의미한다. 솥밥을 먹는 집이 드물다는 것은 곧 쌀밥 혹은 보리밥을 먹는 이가 드물다는 뜻이다.

조선 후기 이앙법이 보급되고 농법이 발달하면서 단위 면적당 쌀 생산량이 늘어났다. 불행히도 여전히 서민들은 쌀로부터 멀었다. 수탈도 심했던 시기다. 조선 말기에도 대부분 서민은 잡곡이 주식이었다.

우리는 쌀에 관한 한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

쌀은 두 종류다. 자포니카종(japonica, 日本種)과 인디카 종(indica, 印度種)이다. 자포니카종은 단립종(短粒種)이다. 쌀 길이가 짧고, 통통하다. 인디카종은 장립종(長粒種)이다. 길고 날씬하다.

‘훅 불면 날아갈 것 같다’라고 표현하는 안남미(安南米)다. 한반도에 소개될 때 ‘베트남 쌀’로 불리면서 얻은 이름이다.

우리는 단립종, 자포니카종을 주로 먹는다. 우리가 먹는 쌀이니 대부분 나라가 우리와 같은 쌀을 먹는 것으로 오해한다. 그렇지는 않다.

전 세계를 통틀어, 단립종의 생산은 10%에 불과하다. 대부분 나라가 안남미, 장립종 쌀을 먹는다. 단립종 쌀을 먹는 지역은 한반도와 일본, 중국 북부 등이다. 동남아와 유럽, 미주 지역은 모두 장립종을 먹는다. 한국에서 유행하는 ‘베트남 쌀국수’도 장립종 쌀로 만든다. 우리가 수입하는 베트남 쌀국수의 대부분은 태국산이다. ‘태국에서 수입하는 베트남 쌀국수’도 재미있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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