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희 수필가
김순희 수필가

벚꽃이 진 영일대둘레길에 또 다른 분홍빛이 꽃불을 켰다. 아, 이 꽃 이름이 뭐였지? 누가 알려줬는데 지난해 휴대폰으로 검색도 했었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무와 꽃 이름을 잘 아는 태명씨에게 전화를 걸어 둘레길에 터널을 이루고 피어있는 꽃나무의 이름을 다시 물었다. ‘꽃아그배나무’라고 금방 알려주었다.

왜 이렇게 안 외워질까? 뇌세포가 쪼그라들었나, 만날 듣고도 자꾸 까먹는다. 이름이 생소하기도 하지만 관심 부족이란 걸 느낀다. 꽃아그배나무가 내게 많이 사랑스럽지 않았나보다.

나와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보는 그렇게 삼사 년 된 지인이 있다. 서로 친구란 말을 하는 사이다. 이번 봄이 시작 될 무렵, 그 분이 내 이름을 쓸 일이 있었다. ‘김순이’라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가슴에 다는 이름표에 써서 주는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 모르게 살며시 네임펜을 들고 글자 ‘이’에 ㅗ을 씌우고 ㅡ를 받쳐 ‘희’로 만들어 주었다. 자세히 안보면 덧칠이 안 보인다. 몇 주가 지나도 이름표에 대해 물어보지 않는 것을 보니 그분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르는 눈치다.

내가 그 사람에게 꽃아그배나무인 것이다. 꽃의 색깔을 알고 어디서 많이 피는지도 알지만 정작 이름은 모른다. 친구라는 이름표가 무색해져버렸다. 슬며시 그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친구에서 그냥 아는 사람으로 이름표를 바꿔 달았다. 시댁에 다니러 갔다. 아버님이 홀로 가꾸어 놓은 뜰로 나가 두릅순과 엄나무순을 따와 전을 부쳤다. 나물 반찬으로 남편과 셋이 둘러 앉아 점심을 먹었다. 두릅순이 한창이라 따고 돌아서면 금세 다른 가지에 새순이 돋는다고 하셨다. 어머님이 계실 때는 장에 내다 팔아 돈을 샀는데 그 돈 써 보지도 못하고 갔다며 쓸데없는 일만 했다며 농을 하셨다.

두릅이 가득한 바구니를 보니 두릅에 대해 몰랐던 그날이 떠올랐다. 나무백일홍이 붉게 피는 걸 구경하러 ‘초곡리 칠인정’에 가다가 둑방에 노랗게 키를 세운 꽃이 눈에 띄었다. 같이 간 일행에게 이름을 물어도 아는 이가 없었다. 며칠 뒤 시댁에 갔더니 텃밭 울타리에 온통 노란 어제 그 꽃이 둘러 있었다. 가만히 보니 그 자리는 봄마다 내가 두릅을 땄던 그 자리였다.

먹고 싶은 순을 달고 있을 때만 가까이 할 뿐 두릅의 여름과 가을의 모습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잎이 크고 꽃이 벙싯벙싯해서 겨울과 봄의 뼈대만 세운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노란꽃술 가득 꿀이 가득해 꿀벌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다. 늦가을이 되면 까만 씨를 맺기 위해 여름내 벌을 불러들였다.

두릅의 사계절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풀도 생각이 깊어지면 나이테를 품을 수 있을까, 두릅은 풀에서 진화해 나무가 된 것 같다. 나무는 쳐다보는 것이라고 배웠는데 아버님 뜰에 두릅은 그러기엔 키가 자그마해서 나무의 특징인 듬직한 둥치가 없다. 땅에서 바로 가지가 솟아나와 끝에 연두빛 불을 켠다. 그 모습은 아직 풀의 특징과 더 닮았다.

치커리는 잎만 따다 싫증이 나서 두었더니 꽃대를 쑤욱 올렸다. 맑은 하늘빛 꽃이 어찌나 고운지 사진을 찍어 만나는 이마다 보여줘도 치커리꽃을 처음 본다고 했다. 텃밭에서 몸을 낮추면 생강꽃, 당근꽃, 완두콩꽃, 꽃이 목적이 아닌 풀들의 전성기가 보였다.

사람에게 부대껴 사람멀미를 할 때마다 꽃구경을 다녔다. 자주 꽃을 보다보니 멀미가 없을 때에도 꽃을 찾아나서 꽃에 집중하는 나를 발견했다. 관심을 갖다보니 꽃이 남긴 이야기와 사람이 남긴 이야기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들꽃이라고 부르던 아이들이 주름꽃, 개구리자리, 좁쌀냉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왔다. 이름을 알고 나니 더 어여뻐 보였다. 꽃들의 이름표를 가슴에 새기고, 사진으로 일기로 기록하다보니 사계절이 지났다. 멀미도 사라졌다. 꽃의 다른 이름은 위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