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S. 바흐의 초상화.  /blog.naver.com 제공
J.S. 바흐의 초상화. /blog.naver.com 제공

학생들과 음악사 수업을 하던 중 다음과 같은 토론 주제를 준 적이 있다.

대작곡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가?

결론은 첫째, 많은 곡을 작곡하여야 한다. 둘째, 다양한 장르의 곡을 작곡하여야 한다. 셋째, 미래의 양식을 지향할 수 있는 진보적인 형식이 있어야 한다, 등이었는데 조건에 맞는 작곡가를 얘기하다 보니 가장 이 조건에 걸 맞는 작곡가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1685∼1750)였다. 현재 남아있는 작품 번호만 1천100여 개에 달하며 그가 활동하였던 바로크 시대는 출판업이 활성화 되지 못하여 악보의 보존과 유통이 제한적이었던 시대였기에 실제 분실된 악보를 추가한다면 그 곡의 수는 훨씬 뛰어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악보의 출판이 활성화 되고 작곡가가 작품의 인세를 받기 시작한 시기는 베토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시대부터이니 바흐뿐만 아니라 다른 바로크 작곡가들의 유실된 악보도 많을 것이다.

바흐의 작품들이 내용적으로 완벽하고 평생 동안 독일을 떠나지 않고 신앙의 힘으로 작곡에만 전념하였던 그였기에 음악에 매료되어 그의 인간적인 부분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바흐도 불행했던 어린시절을 보냈다. 막내였던 그는 10살 이전에 그의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나 장남인 첫째 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Johann Christoph Bach·1671∼1721)에게 양육되었으며 그가 35세가 되던 해 첫째 부인이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두 번째 부인인 마리아 막달레나에게까지 총 20명의 자식들이 있었으나 그 중 절반이 영유아기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그의 나이 38세인 라이프치히의 성토마스 교회에서 활동하고부터는 과도한 교회 업무로 막중한 음악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바흐는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주목받지 못했다. 라이프치히의 성토마스 교회의 음악가를 뽑는 경쟁에서 그는 텔레만(G.P.Telemann·1681∼1767)과 그라우프너(J.C.Graupner·1683∼1760)에 밀렸으나 앞의 인물들이 과도한 업무를 이유로 사임하는 바람에 시의회의 ‘가장 우수한 인물을 얻을 수 없어 중류급의 음악가로 임명해야 한다’라는 다소 모욕적인(?) 성명과 함께 비로소 성토마스 교회의 칸토르로 임명되는, 지금으로는 믿지 못할 사실이 있다.

 

악기를 든 바흐와 그의 아들들.  /cnews. co.kr 제공
악기를 든 바흐와 그의 아들들. /cnews. co.kr 제공

1729년에 초연되었던 ‘마태수난곡’이 이후 100년간 잊혀졌다가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1809∼1847)에 의해 다시 무대 위에 세워졌으며, 20세기 최고의 첼리스트 카잘스(Pablo Casals·1876∼1973)에 의해 1889년 바흐의 6개의 무반주 첼로 조곡이 200년만에 발견된 것은 극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 후 카잘스는 고백하기를 “이 후 12년간 매일 밤 그 곡을 연습했지만 그 중 한 곡이라도 무대에서 연주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결국 25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연주를 해도 되겠다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이 후 이 곡을 발굴한지 47년이 지난 1936년이 되어서야 녹음을 했다고 한다. 현재 이 곡은 첼리스트들의 독주회에서는 절대 빠지지 않는 불멸의 곡이 되었다. 독일의 근대 작곡가 막스 레거(J.B.Max Reger·1873∼1916)는 “작곡가와 돼지는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죽고 난 뒤에야 그 가치를 알 수 있다”라는 재미있는 말을 남겼는데 동시대에 살면서 그 음악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말해주는 문구다.

 

Soli Deo Gloria가 쓰여 있는 바흐의 자필 악보.  /Theinkbrain.worldpress.com 제공
Soli Deo Gloria가 쓰여 있는 바흐의 자필 악보. /Theinkbrain.worldpress.com 제공

바흐의 인생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버지가 되고자 노력했던 사람임에 분명하다.

첫번째 부인을 잃은 다음 해인 1721년, 그의 나이 36세에 새로운 아내를 맞이하게 된다. 16세 연하의 아름다운 여인이라 전해지며 그녀의 이름은 ‘안나 막달레나’였다. 그녀는 궁정악단의 가수였으며 남편의 재능을 존경하고 이해할만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악보를 사보하는 솜씨가 좋아 바흐의 작품을 자주 사보하였다고 전해진다. 바흐는 이 사랑스런 아내에게 두 권의 작품집을 헌정한다. 바로 ‘안나 막달레나 바흐를 위한 음악노트’라는 작품이며 뛰어난 연주 실력을 가지지 못한 그녀를 위한 작품이기에 누구나 연주하기 쉬운 건반 작품집이다. 이 곡 중 영화 ‘접속’의 OST로 유명한 ‘어 러버스 콘체르토(A Lover’s Concerto)란 팝송으로 편곡되어 더 잘 알려진 ‘미뉴에트’도 포함되어 있다.

바흐는 자식들의 음악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다. 정기적으로 가정음악회를 열어 음악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그의 장남이 10살이 되던 1720년에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를 위한 소품집’을 작곡하여 그의 아들에게 선사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교육을 위해 작곡된 것이었다. 그의 가문이 200년간 약 60여 명의 작곡자를 배출한 뛰어난 음악가문이기도 하였지만 그의 자식들 중에는 음악사에 남을 만한 걸출한 인물이 세 명이나 있다. 장남이었던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W.F.Friedemann Bach·1710∼1784)’와 특히 둘째였던 ‘칼 필립 에마뉴엘 바흐(C.P.E Bach·1714∼1788)’는 전고전주의 양식을 이끈 감정과 다양식의 대가였으며 가장 유명했던 막내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J.Christian Bach·1735∼1782)’는 런던 바흐라고도 불리며 그의 부친인 J.S.바흐가 재조명되기 전에는 당시 ‘바흐’라고 하면 이 인물이 지칭될 만큼 아버지 보다 더 유명한 작곡가였으며 모차르트와의 우정이 매우 깊었다고 전해진다.

 

바흐의 곡을 재즈로 편곡해 녹음한 앨범.  /yutube.com 제공
바흐의 곡을 재즈로 편곡해 녹음한 앨범. /yutube.com 제공

J.S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라는 그의 별명처럼 후배 작곡가들에게 성경과도 같은 절대적인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200곡에 달하는 칸타타와 그의 수난곡들은 합창곡 작법의 전형으로 여겨지며, 2권의 ‘평균율 클라이비어곡집’은 각각 24개의 장조와 단조로 된 전주곡과 푸가로 구성되어 피아노곡의 구약 성서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현재에는 24개의 장단조가 모두 자유롭게 작곡되어지나 바로크 시대에는 그렇지 못했다. 일부의 조성들만 완벽하게 인식되어 사용되어 졌는데 바흐는 두 번에 걸친 24개의 클라이비어 곡집으로 모든 조성들을 완벽하게 실험하여 작품으로 만들어 놓았다. 필자는 바흐의 작품을 생각할 때마다 인류 최고의 건축물인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연상하곤 한다. 그 규모의 광대함과 빈틈없는 구조는 현대의 건축물조차 머리를 조아리게 만들며 몇 천년 동안 굳건히 서 있다. ‘세상의 모든 음악들이 없어지더라도 바흐의 평균율 피아노 곡집만 있으면 다시 원래대로 복구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만큼 완벽한 음악적 구조와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바흐 이후 이러한 작품을 흉내낸 작곡가 조차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바흐에 의해 완벽하게 완성된 푸가 기법은 이 후 후대 작곡가들이 푸가 기법으로는 바흐라는 큰 산맥을 넘을 수가 없기에 작품의 일부를 표현하는 기법으로만 제한되어 작곡되는 현상들이 나타난다.

바흐의 말년도 그리 평탄치는 않았다. 바흐의 마지막 작품은 특이하게도 개인을 표현한 예술작품이라기 보다 학습서의 성격을 가진‘푸가의 기법(Die Kunst der Fuge BWV.1080)’이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쓰면서 좋지 않았던 바흐의 눈이 완전히 멀어버린 것으로 예상된다. 바흐는 이 작품을 통해 후세에 자신이 구사할 수 있었던 푸가기법을 모두 전수하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되며 이 작품은 결국 끝까지 작곡되지 못하고 미완성으로 남았다. 아쉽게도 그 곡을 다른 사람의 힘을 빌어 완성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소명이 여기까지 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바흐는 신이 자신에게 허락된 그 순간가지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다.

 

바흐의 ‘미뉴에트’를 ‘A Lover’s Concerto’로 불러 유행시킨 사라 본. /Theinkbrain.worldpress.com 제공
바흐의 ‘미뉴에트’를 ‘A Lover’s Concerto’로 불러 유행시킨 사라 본. /Theinkbrain.worldpress.com 제공

바흐는 신 앞에서 겸손했다. 자신이 작곡하던 작품을 끝내고 난 뒤에는 오선지에 SDG란 약자를 적었는데 풀어쓰자면 ‘Soli Deo Gloria’로, 해석하자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신에게서 잠시 빌려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음악에는 구조적인 완벽함 속에 인간적인 따스함과 신 앞에 선 겸손함이 존재한다. 바흐의 작품은 현재 재즈 연주가들이나 락커 등 클래식 이외 다른 장르의 뮤지션에게 가장 많이 편곡되어 다른 버전으로 연주되어 진다. 바흐의 곡은 어떻게 편곡을 하더라도 너무나 잘 어울린다고 하며 실제로 원곡보다 편곡된 버전이 더 사랑받는 특이한 작곡가이다. 이유는 바흐의 음악은 악기가 지정되어 표현되기 보다는 성부자체로 표현되어 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필자는 생각한다. 바흐의 음악은 신이 인간에게 들려주고픈 음악의 모양과 가장 닮아 있는 예술작품이었으며, 신이 부여한 능력을 타고난 권리가 아닌 의무이자 소명으로 생각하고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최선을 다하여 실천한 진정한 음악의 장인이었다.

/문양일 포항예술고 음악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