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심과 청보리
꽃심과 청보리
  • 등록일 2019.04.21 20:10
  • 게재일 2019.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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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형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 이사
김도형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 이사

꽃심이란 단어를 들어보셨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이 단어는 국어사전에 등재돼 있지 않다. 유사한 단어인 땅심은 국어사전에 올라 있다. 땅심은 ‘땅이 식물을 길러내는 힘’이란 뜻이다. 땅심에서 꽃심의 뜻을 유추해 본다면 ‘꽃의 힘’이란 뜻으로 풀이해 볼 수 있다.

꽃심은 전주의 정신이자 브랜드이다. “부드럽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새 생명을 틔워내는 강인한 힘이 있는 꽃의 힘, 꽃의 마음”이 전주의 정신을 상징한다. 구체적으로 “전주사람들은 대동·풍류·올곧음·창신의 특질이 있으며, 꽃심은 이 네 가지를 다 아우르고 있다”고 한다. 전주는 이러한 해석을 바탕으로 꽃심을 다양하게 응용해 도시 홍보에 활용하고 있다.

꽃심은 어디에서 나온 단어일까? 대하소설 ‘혼불’의 작가 최명희가 “전주를 꽃심 지닌 땅”이라 한 데서 유래했다. 전주 출신의 최명희는 1980년 4월부터 1996년 12월까지 만 17년간 ‘혼불’ 집필에만 전념했으며, 1998년 12월 향년 51세로 숨을 거뒀다. 1930년대 말, 전라도의 한 유서 깊은 문중에서 무너지는 종가를 지키며 몸을 일으키는 종부 3대와 남루한 상민들의 애환을 다룬 ‘혼불’의 주제가 꽃심이다. 한국 소설의 한 장관을 이루고 있는‘혼불’과 최명희는 전주의 자랑이자 긍지다. ‘혼불’ 완독 모임, 꽃심전주 전국독후감대회 등이 꾸준히 열리고 있다. 지난 2006년 4월 개관한 전주의 최명희문학관에 가면 최명희의 치열했던 작가정신과 문학적 발자취, 전주 사람들의 최명희에 대한 존경심을 느낄 수 있다.

꽃심은 지역에 기반한 예술정신을 도시 브랜드로 활용한 모범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포항은 이 같은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주제나 소재가 없을까? 바야흐로 청보리가 익어가는 계절이다. 지금 구만리에 가면 청보리가 바람에 일렁이고 있다. 한때는 10만여 평의 광활한 보리밭이 펼쳐져 있던 곳이다. 지금은 경작 면적이 많이 줄었지만, 구만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쪽빛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져 있는 청보리밭이다. 그 원색의 향연은 구만리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황홀한 풍경화이다.

청보리는 푸른 생명의 원천이다. 청보리를 떠올리는 순간, 푸르디푸른 생명의 기운이 마음속 깊이 스며든다. 구룡포사람들조차 식은밥 먹고는 가지 마라는 바람의 땅 구만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푸른 잎을 피워내는 청보리는 거센 자연의 바람과 역사의 바람을 견디며 살아 온 이 지역사람들의 영혼이 오롯이 배여 있다.

보리 하면 떠오르는 문인, 한흑구가 있다. 포항에 문학과 예술의 씨를 뿌린 이가 한흑구다. 본명이 세광(世光)이고, 평양 출생인 그는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다가 1929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노 노스파크대학에서 영문학을, 템플대학에서 신문학을 전공했다. 일제에 항거하다 1939년 흥사단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고, 단 한 편의 친일작품이 없다. 미국문학 번역에 크게 기여했으며, 한국 수필문학의 정립도 한흑구 없이는 얘기할 수 없다. 특히 그가 남긴 ‘보리’는 한국 수필의 백미다.

“너, 보리는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자라나고, 또한 농부들은 너를 심고, 너를 키우고, 너를 사랑하면서 살아간다. 보리, 너는 항상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흑구는 미군정 통역관으로 있다가 첫 수필집 ‘동해산문’(1971) 서문에 밝힌 것처럼 “항상 푸르고 맑고, 볼륨이 넓고, 거센 바닷가에서 한가히 살고자” 포항에 정착했다. 그의 삶과 문학적 여정은 청보리의 빛깔 그 자체이다. 한흑구는 포항의 자랑이자 긍지가 될 자격이 충분히 있다. 한흑구에 대한 재조명과 함께 청보리를 포항의 정신이자 브랜드로 활용해보는 방안은 없을까? 미증유의 지진과 여러 어려움이 겹쳐 있는 시기, 구만리 봄바람에 푸르게 일렁이는 청보리밭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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