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별아의 신라정신의 원류와 본질을 찾아서
풍류도도 들었을 만파식적, 그 피리소리를 좇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편집자가 조건 없이 허락해준다면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아! 감은사…….” 이렇게만 반복하여 쓰고 싶다고 했다. 신라의 석탑 가운데 가장 완벽한 균형감을 보여주는 감은사지 3층 동(오른쪽)서 석탑 뒤편으로 감은사 금당 터가 보인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반짝이는 것들이 모두 보물은 아니다. 그러나 보물, 진정 드물고 귀한 가치를 지닌 보배로운 것은 기어이 반짝이게 마련이다. 세월의 먼지를 들쓰고 땅속 깊이 묻혀도 훼손되지 않는다. 훼손될 수 없다.

(신문)왕이 행차에서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하였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는 개며, 바람이 잦아들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이를 만파식적(萬波息笛)으로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삼국유사’ 기이 편에는 신라의 보물을 보관한 월성의 보물창고가 나온다. 이름 하여 천존고, 하늘에서 내린 신물(神物)을 보관하는 곳이다. 백률사 조에는 신문왕이 신적을 얻어 현금(玄琴)과 함께 내고(內庫)에 간직해두었는데, 효소왕 때 부례랑이 도적들에게 붙잡혀가자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를 덮으면서 창고 안에 있던 거문고와 피리 두 보물이 없어졌다고 했다.
 

왕이 행차에서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하였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는 개며, 바람이 잦아들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이를 만파식적(萬波息笛)으로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일단 천존고와 내고는 월성의 보물창고로 같은 곳을 지칭하는 듯하다. 부례랑 혹은 실례랑이라 불린 국선은 부모가 백률사에서 기도를 바친 덕분에 보물과 함께 돌아와 재상에 해당하는 대각간이 된다. 만파식적은 다시금 기이한 보물로 추앙되어 만만파파식적이라는 이름을 얻는다(693).

이 피리가 백 년 조금 못 미처 원성왕 때(786) 다시 등장한다. 아버지 김효양에게서 만파식적을 전해 받은 원성왕이 보물을 빌려달라고 조르는 일본 왕의 요청을 물리치고 만파식적을 내황전(內黃殿)에 보관한다. 내황전이 월성에 있던 천존고와 내고와 같은 곳인지 새로운 보물창고인지는 알 수 없다. 어쩌다가 김효양이 대대로 만파식적을 물려받아 간직하고 있었는지도 확실치 않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중에서도 음악 편에 ‘만파식 설화에 대한 고기 기록’을 썼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신문왕 때 동해 가운데 홀연히 한 작은 산이 나타났는데, 형상이 거북 머리와 같았다. 그 위에 한 줄기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갈라져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베어다가 적(笛)을 만들어, 이름을 만파식이라고 하였다” 한다. 비록 이런 말이 있으나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

유학자의 붓은 냉정하다.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단다. 냉소로 입아귀를 비트는 김부식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어느 편도 쉽게 들고 싶지 않다. 과연 역사는 이성과 감성, 냉정과 열정, 사실과 신비가 만나는 지점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황룡사지, 그 다음은 감은사지! 꼭 가보세요!”

개인적으로 황룡사지에 이어 ‘강추’하는 명소는 감은사지다. 그 두 개만 보고와도 경주 여행은 만족스러우리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추천한다. 황룡사지와 감은사지에서 느끼는 감흥은 좀 다르다.

황룡사지가 시(詩)적이라면 감은사지는 산문에 더 어울린다. 감은사지의 동과 서 삼층석탑 앞에 섰을 때,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서 고흐의 그림 ‘오베르 교회’를 보았을 때와 같은 감흥을 느꼈다. 그 푸른 빛, 코발트블루의 어두운 하늘과 교회의 창은 어느 도록에서도 보지 못한 빛깔이었다. 초록과 노랑이 뒤엉켜 흐르는 듯한 길, 그것도 사진이나 인쇄물로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다. 미술관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 경비원이 등을 떠밀 때까지 나는 ‘오베르 교회’ 앞에서 떠날 수 없었다.

세상이 좋아서 안방에 앉아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자기 발로 찾아가서도 도저히 볼 수 없는 것들까지 볼 수가 있다. 때로 영상이나 모사가 실제보다 세세하고 생생하다. 그러다보니 눈이 높아진 건지 본디 그다지 대단한 게 없었던 건지, 정작 실물 앞에 서면 시시하고 맹맹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오베르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감은사지 삼층석탑’이 그랬다. 숨이 턱 막히고 한동안 말을 잃었다. 오직 내 발로 다가가 그 앞에 서야 한다. 천년 전과 다를 바 없을 바람과 햇살을 맞으며 목을 꺾고 쳐다봐야 한다. 눈부시다. 아무리 좋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도 이처럼 압도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균형감으로 아름다운 삼층탑 뒤로 감은사 터가 자리한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특이한 구들 구조를 가진 금당 앞에 털끝이 쭈뼛 선다. 이것은 사람의 집과 길이 아니다. 신성한 용(龍), 용이 된 왕을 위해 뚫어놓은 것이다.

이번에 월성과 신라 역사를 공부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인물이 문무대왕과 신문왕이다. 그들은 격동기의 영웅이자 신라 중대(中代:29대 태종 무열왕∼36대 혜공왕·8대 127년간)의 핵심이다. 특히 문무왕의 일대기를 살폈을 때는 울컥 감정이 치밀었다. 영웅에 대한 존숭이라기보다 인간에 대한 연민, 그리고 요즘 식으로 표현해 ‘리스펙트(respect)’의 심정이었다.

문무왕 김법민은 김춘추와 김문희의 아들이다. 김춘추는 진골로 처음 왕위에 오른 태종무열왕이고 김문희는 김유신의 둘째 동생으로 언니에게서 ‘오줌 꿈’을 샀던 바로 그 여랑이다. 법민은 아버지와 외삼촌과 함께 통일전쟁에 뛰어든다. 그의 평생은 치열한 전투, 또 전투였다. 왕위에 오른 후로도 백제의 부흥운동을 진압하고,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으며, 고구려 무너진 뒤 대당독립전쟁을 벌여 한반도에 욕심을 드러내는 당나라를 물리쳤다.

더군다나 문무왕의 시기에 중국을 지배한 것은 피의 여제, 측천무후였다. 황제가 되기 위해 자신의 아들까지 죽였던 측천무후의 공포정치에 대응해 문무왕은 두뇌게임으로 교묘한 외교전을 벌인다. 마키아벨리의 말처럼 “덫을 식별하기 위해 여우가, 늑대를 물리치기 위해 사자가” 된 것이다.

그토록 고단한 일생을 보내고도 그는 마지막까지 ‘상징’으로 남기로 한다. 죽어서도 동해의 용으로 신라를 지키겠다며 수중 장례를 치른다. ‘대왕암’으로 불리는 문무왕릉의 구조는 감은사 법당의 구조와 유사할 것으로 짐작된다.

1940년에 미술사학자 고유섭이 펴낸 ‘고려시보’에 실린 ‘경주기행의 일절’을 다시금 떠올린다.

“경주에 가거든 문무왕의 위적을 찾으라. 구경거리의 경주로 쏘다니지 말고 문무왕의 정신을 기려보아라. 태종 무열왕의 위업과 김유신의 훈공이 크지 않음이 아니나 이것은 문헌에서도 우리가 가질 수 있지만, 문무왕의 위대한 정신이야말로 경주의 위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니, 경주에 가거들랑 모름지기 이 문무왕의 유적을 찾으라.”

문무왕과 그의 유훈을 받잡은 신문왕의 발자취를 좇아 ‘왕의 길’을 걷기로 했다. 아버지를 동해에 수장한 아들은 절을 짓고 누대를 쌓는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행차해 아버지를 추모하는데, 용이 바친 흑옥대를 얻고 만파식적을 만들 대나무를 구한 것도 이 길에서였다. 2012년 경주시가 함월산 국립공원 내에 개설한 길의 정식 명칭은 ‘신문왕 호국행차길’이다. 모차골 입구에서 기림사까지 약 5.9㎞에 이르는 길인데, 문제는 자동차를 가지고 갈 경우 돌아오는 차편이 없어 고스란히 왕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은 수렛재까지 가보려고 나섰는데 초입에서 100m쯤 지난 후부터 여의치 않다. 지난 태풍의 후유인 듯 돌과 나무가 뒤엉켜 길을 지우고 있다. 수북이 쌓인 낙엽을 헤치고 걷자니 더욱 힘겹다. 모차(마차)골, 수렛재, 말구부리 등의 지명을 통해 신문왕이 수레를 타고 지났던 길임은 분명한데, 지금은 사람이라도 일렬로 지나야 한다. 산행을 포기하고 돌아서 기림사를 향했다. 반대편의 형편은 낫지 않을까 했던 건데 결과적으로 아주 잘한 선택이었다.

신문왕은 감은사에서 자고, 기림사 서쪽 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는다. 월성을 지키고 있던 태자(효소왕)가 말을 달려와서 신문왕이 가져온 흑옥대를 살펴보더니 “이 옥대의 여러 쪽들이 모두 진짜 용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한쪽을 떼어 시냇물에 던지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못이 되었다. 그래서 그 못의 이름이 용연(龍淵)이다……

기림사는 단청 없는 대적광전을 보물로 품은 아름다운 절이다. 기림사 쪽에서 반대로 호국행차길을 오르니 오래지 않아 용연이 나타난다. 포기하고 지나갔으면 후회할 뻔했다. 한겨울에도 시원한 물줄기를 쏟아내는 폭포와 맑은 연못, 그리고 묘하게 쪼개진 듯한 바윗돌이 신비롭다. 던져 넣은 허리띠가 용이 되어 승천했다고 해도 순진한, 혹은 신심 깊은 사람들은 믿을 만하다.

기실 이 길은 문무왕의 장례 행렬이 지난 길이었고, 신문왕이 부왕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갔던 길이었으며, 수백 년 동안 신라를 괴롭혀온 왜구의 침범 루트이기도 했다. 그러니 자주 행차해 걸어주고 정비해야 마땅했을 것이다. 더하여 아버지의 분투를 가장 곁에서 지켜보았을 아들이, 왕관을 쓰기 전까지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고독을 제 것으로 곱씹으며 걸었을 길이기도 하다.

감은사와 대왕암이 함께 보이는 원래의 이견대 자리는 아니지만, 아쉬운 대로 길가의 이견정에서 대왕암을 바라본다. 푸른 물결과 흰 포말 사이로 한 줄기 행여 피리소리가 들릴까 귀를 세운다.

성낙주는 ‘에밀레종의 비밀(2008·푸른역사)’에서 황수영이 발표한 ‘신라종 양식과 만파식적’을 발전시켜 에밀레종의 만파식적 기원설을 주장한다. 또한 만파식적과 흑옥대 등 안정기에 돌연히 출현한 새로운 신기들을 정치적 수단으로 해석한다. 만파식적 설화 중 후일 효소왕이 되는 태자가 등장하는 ‘흑요대’ 부분은 후대의 가필로, 부례랑이 납치되고 천존고에 보관 중이던 만파식적과 현금이 사라진 것은 효소왕대의 정치 불안을 상징하는 것이다. 얻기에 어려우나 지키기는 더 어려운 이치가 그곳에도 있다.

문무왕은 문(文)과 무(武)를 아우르는 이름으로, 길고 고단한 전쟁이 끝나고 마침내 평화의 시대가 펼쳐지길 기원하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김부식은 비하하듯 만파식적을 ‘삼국사기’의 ‘음악’편에 실었지만, 경계 없이 멀리 가는 만파식적의 피리소리는 음악을 통해 세상을 교화한다는 유교적 ‘예악’의 이데올로기와 닿아 있다. 에밀레종의 종소리는 ‘일승지음’, 부처님의 음성을 닮아 목숨들을 피안의 낙토로 실어 나르는 커다란 수레가 되길 기원하는 것과 연관된다.

월성 안에서 에밀레종 소리를 듣고, 대왕암을 바라보며 피리소리를 더듬는다. 이름부터 멋진 천존고는 아쉽게도 월성 안이 아닌 불국사 가는 길에 출토 유물 보관 건물로 개관했지만, 보배로운 마음은 애초에 창고든 전시실이든 가둘 수 없는 것이다. 문제적 인간 김법민, 물결을 덮고 잠드신 문무대왕의 마음을 바람결에 가만히 헤아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