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길수수필가
강길수 수필가

마음이 옴찔해졌다. 걷는 도로가 콘크리트 틈새에 시선이 저절로 머문 때문이다. 부슬부슬 단비 오는 사월 초순 한낮이다. 어제 이맘때는 저곳에서 황금빛 해님 셋이 활짝 웃으며 오가는 이를 반겼는데, 오늘은 웬일로 그 해님들이 기도 손으로 변신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다. 큰길 가로수 밑 잔디 새싹 사이에도, 같은 종의 쪼그만 기도 손이 여럿이다. 잔디 잎에 숨어있어, 잘 살펴야 보인다.

‘황금빛 해님들이 사월의 기도를 바치다니! 사람 몸 둘 바를 모르게 하는구나.’

그랬다. 도시에 살면서도 여기저기서 숱하게 보는 꽃이기에 늘 무심히 다녔었다. 한데, 그 꽃이 긴 밤 동안 올린 기도도 모자라 비 내리는 낮에 기도 손이 되어, 간절한 기도를 바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해 이월부터 십이월까지 끊이지 않고, 이 도시에서 저 꽃들은 만났었다. 물론 사월에 가장 많이 피었지만, 때도 장소도 가리지 않고 피고 지며, 씨앗 맺는 모습이 마음을 불편하게 할 때도 많았다.

기도는 사람만이 하는 것인 줄 알았다. 알고 보면 그게 아니었다. 바닷가나 강둑, 시냇가 방천이나 논밭 둑, 산자락이나 산 오솔길 옆, 도시 가로수 밑이나 심지어 콘크리트 틈에서까지 억세게 살아내는 여러해살이 풀 민들레…. 그 민들레가 언제, 어디에, 어떻게 살든 일구월심 기도를 올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대체 민들레꽃은 무슨 기도를 바치기에, 하늘 향한 기도 손이 저리도 애절할까. 빗물 스며들 틈도 주지 않으려는 듯 옹골차게 오므린 기도 손이, 다부지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하다.

민들레는 일생을 기도하며 산다. 새싹 틀 때부터 잎은 하늘 향해 손 벌리고 기도한다. 꽃이 피면 낮엔 고개 들고 하늘을 바라보며 손 벌린 기도를 한다. 밤엔 아예 꽃이 기도 손으로 변한다. 꽃 지고 씨앗 여무는 기간은 밤낮없이 손 모아 기도한다. 지난 이월, 놀라며 만났던 민들레꽃 한 송이와 관모(冠毛) 송이 하나. 그땐 기후변화란 시대 징표만 보았지, 민들레의 삶 전체에 스민 기도는 느끼지 못했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저지른 환경오염 카르마도 못 본체 살고 있으니, 저 민들레가 대신하여 기도하며 사는구나 싶다. 다가올 미증유의 시대를 대비하여, 철 가리지 않고 꽃 피우고 열매 맺어 자손을 퍼뜨리는 메시지가 오늘에야 마음에 와 닿았다. 학창 시절 제 발로 친구와 성당에 찾아가 영세하고, 기도생활을 한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내 기도는 거의 형식적이거나 이기적, 의무적으로 하는 게 고작이었다. 이성(理性) 있는 인간이라면, 민들레처럼 시대 징표를 읽고 대처하는 진정한 기도와, 그에 걸맞게 실천하는 삶이 되어야 마땅할 터다. 이를테면 자연환경 보전을 위해 물 한 방울, 휴지 한 장 아껴 쓰며, 세제 한 방울이라도 덜 쓰고, 밥알 하나 소중하게 남김없이 먹는 그런 삶을 꾸려왔어야 했다. 그런데도 늘 타성에 젖어, 기도와 무관하게 적당히 세상살이에 타협하면서 살아왔다. 오늘, 삶이 곧 기도인 민들레 앞에서 나는 부끄러운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

누가 감히, 식물을 하찮게 여기고 대할 수 있단 말인가. 지구 생태계 생명들 중에 어느 종이 가장 이타적으로 살고 있는가. 바로 식물이다. 미생물을 포함한 대부분의 동물들은, 그 삶의 기반을 식물에 두고 살고 있음은 모두가 아는 진실이다. 민들레만 하더라도 뿌리에서 잎, 꽃까지 식용이나 약용, 술과 마시는 차의 재료로 쓰이며 자기를 온전히 사람에게 바치고 있지 않은가. 혹자는 독초도 있고, 곤충을 잡아먹는 식물, 고등생물들에 해로운 식물도 있다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식물들도 나름대로 존재 이유가 있음이 분명할 것이다. 다만 인간이 아직 모를 뿐일 테니까.

비록 늦었더라도, 민들레 따라 사월의 기도를 올리자. 기도가 삶으로 이어져, 미래를 대비하는 지혜와 열정을 닦자. 민들레꽃 관모가 바람 타고 높이 날아 번성하듯, 나도 희망의 관모를 하늘 높이 날려 보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