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형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늦은 밤 라디오 프로그램의 오프닝 멘트를 듣고 필자는 순간 넋을 놓아버렸다. 아나운서는 “짓다”라는 단어에 대해 설명하였다. “무언가 각별한 것을 만들 때 우리는 만든다는 서술어 대신 짓는다는 표현을 쓸 때가 있습니다. 밥을 짓고, (중략) 집과 글 등을 지을 때가 그렇지요. 한 번에 뚝딱 만들어지는 것들에는 짓는다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사람의 노력과 시간, 그리고 정성과 진심이 들어 간 것들에만 비로소 짓는다는 말을 붙이곤 하죠. (하략)”

필자는 ‘교육’과 ‘짓다’를 연결해 보았다. “교육을 짓다!” 역시 어색했다. 어색함의 원인은 두 단어의 상반된 이미지 때문이라는 것을 금방 알았다. ‘교육’의 차가움과 ‘짓다’의 따뜻함!

교육은 한 때 개인과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부모들은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자녀를 교육시켰다. 교사들 또한 사명감으로 교육에 매진했다. 부모의 희생과 교사의 헌신을 아는 학생들은 이들의 정성에 보답하고, 나아가 국가 발전에 공헌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비록 많은 것이 부족한 시절이었지만, 학생들의 마음속엔 꿈이 넘쳤다. 그 꿈은 현실이 되었다.

아마 그 때는 ‘교육’과 ‘짓다’를 연결해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이 두 단어가 매개가 되어 “교육이 희망을 짓다!”와 같은 명문장이 만들어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아브라카다브라(Abracadabra)를 외치는 것처럼 모든 것이 말하고, 쓰는 대로 이루어졌던 때가 우리 교육계에도 분명 있었다. 그 때의 사람들에겐 신명이 충만하였다.

하지만 적폐청산의 덫에 걸린 이 사회 어디에서도 신명을 찾을 수 없다. 국민은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그 아우성에 봄꽃도 자세를 한껏 낮추어 피었다 진다. 그런데 적폐놀이의 재미에 빠진 양치기 정치인들만 좋아지고 있다고 히죽댄다. 이들의 현실인식 수준은 재난 수준이다.

그런데 재난 수준의 재앙이 발생한 곳이 한 곳 더 있다. 바로 학교다. 봄꽃이 한창인 4월, 재난과 같은 시험이 학교를 휩쓸고 있다. 학생들은 유황불보다 더 뜨거운 시험에 마음은 물론 꿈과 희망을 데였다. 불에 덴 상처에는 좀처럼 새살이 돋지 않는다. 생명력 강한 산에도 산불이 지난 후에 다시 생명이 자라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물며 우리 학생들은 어떨까?

학교 붕괴, 교육 무용론 등 교육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 설자리를 잃었다. 교육이 이 지경까지 온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필자는 시험에 대한 교사들의 오해와 부모의 시험 점수에 대한 욕심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많은 교육 전문가들이 평가방법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내놓고 있지만, 시험은 더 괴이한 모습으로 변해 학생들을 학교 밖으로 내몰고 있다.

“공부 없는 세상, 학교 없는 세상, 시험 없는 세상”을 “학생들의 천국”이라고 말하는 글을 보았다. 과연 이런 세상이 존재할까? 비록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어려운 세상이지만, 이 나라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 즈음은 꿈꾸었을 세상이다. 사회는 예측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변화가 있다. 하지만 학교 시험은 요지부동이다.

시험을 바꿀 수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시험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보자. 예전처럼 시험 기간이 되었으니까 무조건 공부를 해서 시험을 보라는 식이 아닌 학생들에게 시험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자, 그것도 시간을 두고 진심을 다해서! 그리고 교사들도 점수를 위한 시험이 아닌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의 변화 정도를 점검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자신의 학교생활을 스스로 개선해 나갈 수 있는 문제를 정성을 다해서 지어보자. 학부모들도 시험 결과에만 눈멀지 말고, 자녀들이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을 응원하자. 그리고 결과에 대해 격려하자. 이렇게만 된다면 이 나라 교육도 잃어버린 희망을 다시 지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