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휘논설위원
안재휘 논설위원

1년 9개월여 기간 통일부 수장으로서 대북정책을 수행했던 조명균 장관이 이임식도 없이 편지 한 장 달랑 남기고 장관실을 훌쩍 떠났다는 소식은 여운이 남는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도발과 3차례 남북 정상회담을 모두 지켜보며 대응책을 궁구했던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지난 1월 9일 조명균은 국회 답변 중에 “북한이 계속해서 주장하는 ‘조선반도(한반도) 비핵화’와 우리가 목표로 하는 ‘북한 비핵화’와는 차이가 있다”고 시인했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3차 북미정상회담에 나설 의지가 있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대화 시한’을 올해 연말로 한정했다. 조선중앙통신은 김 위원장은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미국이 올바른 자세를 가지고 우리와 공유할 수 있는 방법론을 찾은 조건에서 제3차 조미(북미)수뇌(정상)회담을 하자고 한다면 한 번은 더 해볼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김 위원장이 시정연설에서 남측을 향해 던진 메시지는 강했다. 그는 우리 정부에 대해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일원으로서 제정신을 가지고 제가 할 소리는 당당히 하면서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시니컬한 충고를 던졌다.

북한 선전매체는 지난달 스텔스 전투기 F-35A 2대가 국내에 도착한 것을 두고 날을 세웠다. 대남 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는 F-35A의 공군 청주기지 도착을 거론하며 “박근혜 역도가 대결시대에 계획하였던 전쟁장비 반입 놀음을 고스란히 실행하고 있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배신적 망동”이라고 을러댔다.

문재인 대통령의 1박 3일 미국 방문을 놓고 말이 많다. 청와대는 이번 회담에 대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정착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허심탄회한 논의’라는 용어는 ‘진전이 없었음’을 말하는 외교적 수사라는 측면에서 한미정상회담 결과에 대한 평가는 후하게 매겨질 여지가 없다.

문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강력하게 뒷받침해온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마저 회의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그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서 “지난번의 하노이 회담에 이어 이번 한미정상회담도 ‘워싱턴 노딜’”이라며 “전혀 한미 간에 접점을 만들지 못했다”고 평했다.

청와대 언론보도문에는 남북 정상회담 추진 계획, 추가 북미 정상회담 의지, 톱다운 방식 대화 지속 등의 표현이 있지만, 백악관 자료에는 이런 내용이 하나도 담기지 않았다. 비핵화 문제와 관련해 공통된 문장은 “대화의 문이 항상 열려 있다” 하나뿐이었다. 정치권 안팎의 반응이 대통령의 방미에 대해 ‘가서 뭘 했나’ 수준을 넘어서 ‘이럴 바엔 왜 갔나’는 차원으로 번지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문 대통령을 향해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하지 말라”고 퉁을 놓기까지 한 마당에 우리 정부의 처지는 참으로 딱하게 됐다. 이렇게 된 데는 역시 북한 김정은은 ‘미군 철수’를 노림수로 둔 ‘조선반도 비핵화’를 변함없이 부르대는데, 문재인 정부가 이를 ‘북한 비핵화’로 의역하여 우리 국민과 미국에 전달해온 패착에 기인하는 것으로 읽는 것이 맞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개념 비틀기가 실수였는지, 아니면 의도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이 부분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한 발짝도 진전되기 어렵다. 더욱이 무구한 우리 국민이 더 이상 흐리멍덩한 개념에 현혹돼 금방이라도 영구평화가 정착될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살게 해서는 안 된다. 세월이 좀 더 지나면 ‘조선반도 비핵화’와 ‘북한 비핵화’ 사이의 끔찍한 비밀이 밝혀질 것이다. 그 은밀한 열쇠를 쥐고 있을 조명균에게 더 물어보고 싶지만, 그는 퇴임 후 당분간 야인(野人)으로 지내겠다며 뒤안길로 꽁꽁 숨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