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한국기자협회와 한국언론재단이 공동주최한 ‘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체험연수’로 중국 하얼빈과 대련을 찾았다. 3박4일간 조린공원(구 하얼빈공원), 하얼빈역, 안중근 기념관, 동북열사기념관, 731부대, 여순감옥,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으로 이어진 항일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찾은 체험은 우리 독립운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하는 시간들이었다.

우선 일제가 중국을 침략한 이후 인체실험을 자행했던 731부대를 복원해놓은 현장을 둘러보면서 일제가 저지른 전쟁범죄가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를 목도했다. 전시장 입구의 ‘비인도적 잔학행위’란 말 그대로였다. 일본 731부대원들은 임산부와 어린아이들의 배를 갈라 장기샘플을 만들고, 조선족과 중국인들을 무차별로 붙잡아서 세균이 생체에 미치는 영향을 실험했으며, 이같은 참혹한 만행이 사진과 자료등으로 증언되고 있었다. 식민지 조국의 참상을 여실히 들여다 볼 수 있었고, 조국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또 하나는 일본 초대 내각총리대신이자 초대 한국통감으로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데 앞장선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저격한 안중근(1879-1910)의사의 행적을 되짚어보면서 가슴깊은 감동을 다시 한번 새기게 됐다. 안중근 의사는 우리 독립운동 역사에서 최초로, 가장 큰 쾌거를 거둔 독립운동가다. 조선이 일제의 부당한 침략을 받았으며, 조선은 일본의 통치를 반대한다는 주장을 전세계에 처음으로 직접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 저격 직후 ‘코레아 후라(대한민국만세)’를 외치며 러시아군에 체포돼 일본군에 넘겨졌으며,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의 6차 공판끝에 사형을 언도받고 31세의 나이에 순국했다. 여순일본관동법원 전시관에서 해설을 자청한 조선족 출신 정춘매 부관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장렬한 안 의사의 행적을 이렇게 전했다. 그는 법정에서 이토가 조선반도를 침략하고 동양평화를 파괴한 죄상을 15가지로 조목조목 설명했으며, 사형판결후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상소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의 모친 조마리아 여사도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너는 나라를 위해,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죽으라”는 말을 안 의사에게 전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중국은 우리와는 또 다른 시각에서 조선독립운동을 바라본다는 점을 알게됐다. 실제로 일제에 맞서 조선독립운동을 했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중국내 50여 민족중 하나인 조선족으로 분류돼 항일열사로 추앙받고 있었다. 한 예를 들면 중국의 항일열사로 이름을 올려놓고 있는 경북 선산출신 허형식(1909-1942)은 동북인민혁명군으로 항일독립운동을 펼친 항일열사다. 중국에서는 그를 조선족출신 항일열사로 이름을 올려놓고 추앙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독립운동가로 서훈하지 않고 있어 최근에 포상서훈을 신청중이다. 이는 흑룡강성·길림성·요녕성 등 중국 동북3성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펼친 이들이 대부분 공산당과 함께 항일운동을 펼쳤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과 중국이 똑같이 일본으로부터 제국주의적 침략을 받았으면서도 좌우이념에 따라 항일독립운동가들을 차별대우하는 것은 통일한국을 지향하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동북항일운동과 북한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정창현 평화연구소장은 “1945년 해방이전에 항일독립운동을 하다 죽은 조선족 독립운동가들은 좌우이념과 상관없이 우리의 독립운동사에 편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동북삼성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펼치다 해방 이전에 숨진 이들은 해방 이후 북한정권 수립을 도왔던 좌파 항일운동가들과는 달리 평가해야 한다는 논지를 펴고 있다. 우리 민족이 일제의 수탈 아래 신음하다 강대국의 신탁통치, 그리고 이념에 의해 남북분단이 됐다면 동북항일운동은 분단 이전에 일제의 침탈에 맞서 싸운 역사다. 이런 동질감의 역사를 제대로 복원하지 않고서 통일시대를 맞이하기란 참으로 요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