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의 경북의 멋과 맛을 찾아서
누가 ‘우물 안 개구리’였을까?

경북·대구에는 돼지불고기집이 많다. 돼지고기를 포함해 ‘고기 문화’는 큰 도시에서 전해져 왔다.

서울 토박이가 물었다. 솔직히 표현하자면 ‘여자애같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얘, 너 대구에서 올라왔지? 너 시골 출신 맞지?”

서울 토박이들의 특징 하나. 서울을 제외하면 죄다 ‘시골’이다. 이런! 광주도, 부산도 죄다 ‘시골’이다. 당연히 대구도 시골이다. 그래 인정하자. “응, 나 대구 출신이야!”

또 묻는다. “그런데, 진짜 대구에서는 돼지고기로 국을 끓이니?” 한참을 못 알아들었다. 돼지고기로 국을 끓이지. 그럼, 끓이고말고. 그게 얼마나 맛있는데. 한참을 쳐다보다가 “그래 돼지고기 국 맛있다”라고 하자 못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묘한 표정이다. 조심스럽게 내뱉는다. “진짜 시골에서는 돼지고기로도 국을 끓이는구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알아차렸다. 서울 사람들은 국물에 빠진 돼지고기는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서울 사람들이 먹는 ‘국물에 빠진 돼지고기 음식’은 김치찌개뿐이다.

 

대구 돼지국밥 골목의 국밥과 수육, 순대.
대구 돼지국밥 골목의 국밥과 수육, 순대.

◇ 불교를 믿어서 고기를 먹지 않았다?

송나라 사신 서긍(1091~1153년)은 1123년 고려에 온다. 왕복 3개월, 고려 체재는 한 달 정도였다. 고려 수도 개성에 머물면서 대여섯 번 바깥나들이도 한다. 비교적 상세히 고려를 본 셈이다. 돌아가서 송나라 궁중에 고려에 대해서 보고한다. ‘고려 출장 보고서’가 바로 ‘선화봉사고려도경(고려도경, 高麗圖經)’이다. 이 책 제23권_잡속(雜俗)2_도재(屠宰) 편에 ‘돼지고기’가 등장한다.

고려는 정치가 심히 어질어 부처를 좋아하고 살생을 경계하기 때문에 국왕이나 상신(相臣)이 아니면, 양과 돼지의 고기를 먹지 못한다. 또한, 도살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다만 사신이 이르면 미리 양과 돼지를 길렀다가 시기에 이르러 사용하는데, 이를 잡을 때는 네 발을 묶어 타는 불 속에 던져, 그 숨이 끊어지고 털이 없어지면 물로 씻는다. (중략) 비록 국이나 구이를 만들더라도 고약한 냄새가 없어지지 아니하니, 그 서투름이 이와 같다.

첫째, 불교를 믿어서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은 엉터리다. 만약 불교 때문이라면 지배층 즉, 국왕과 대신부터 모범을 보여야 한다. 고기를 먹지 않았던 것은 불교 때문이 아니다. 불교는 핑계일 뿐, 고기가 귀했기 때문에 금육을 한 것이다. 특히 소는 농사 도구였으니 피했고, 사신이 오더라도 미리 길러둔 양과 돼지를 내놓은 것이다. 둘째, 도축하는 방법은 서툴다. 오랫동안 도축을 하지 않으면 솜씨가 녹슨다. 게다가 원래 도축을 능숙하게 했던 나라가 아니다. 고기 만지는 모습이 아주 엉성하다.

재미있는 것은 고기를 먹는 방법이다. ‘국과 구이[羹<43D1>, 갱자]’다. 고기를 자주 먹지 않았던 고려에서도 ‘돼지고기 국’ ‘돼지국밥’이 있었다는 뜻이다.

중국의 시인 소동파는 1037년 태어나서 1101년 죽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동파육(東坡肉)’은 소동파가 시작한 음식이다. 소동파는 ‘고려도경’의 시대보다 약 50년 정도 앞선다. 소동파의 시대에 이미 중국에는 장에 고기를 넣고 졸인 음식이 있었다. 동파육은 선진적인 음식이다. 동파육을 먹다가 고려에서 불에 막 구운 돼지고기 국, 구이를 먹으며 얼굴을 찡그렸을 서긍의 얼굴이 떠오른다.

 

돼지국밥과 암뽕순대. 40년간 영업해 온 대구 성화식당이다.
돼지국밥과 암뽕순대. 40년간 영업해 온 대구 성화식당이다.

◇ 기마민족인가, 농경민족인가

고기는 유목, 기마민족의 먹을거리다. 깊은 산속 혹은 북방의 너른 터를 떠돌며 살았던 북방 기마, 유목민족들은 고기를 손질하거나 먹는 일이 익숙하다. 기후 때문에 어차피 농사는 힘들다. 곡물이 자랄 수 없다. 먹어야 산다. 사냥이 주업이다. 사냥을 통하여 얻은 고기는 유목민족의 식량이다. 지금도 몽골인들은 유목 생활로 짐승을 기른다. 고기가 주식이다.

우리는 곡물을 주식으로 삼는 나라다. 우리도 기마민족의 피를 물려받았다. 고구려, 부여 등은 전형적인 북방 기마민족이었다. 이들의 피가 백제를 통하여 한반도에 스며들었다. 한반도 태백산맥 언저리에 살았던 동예, 옥저도 마찬가지. 부여, 고구려, 북방 기마민족의 피를 물려받았다.

석학 이어령 선생은 “한민족은 모순된 민족”이라고 이야기한다. 기마민족의 피를 물려받았고 농경민족화 되었다. 기마민족과 농경민족의 특질이 뒤섞여 있다. 활을 잘 쏜다. ‘빨리빨리’를 외치면서도 된장, 간장 등은 오랫동안 묵힌다. ‘빨리’와 ‘느리게’가 뒤섞인, 모순된 민족이다. 오래전에는 우리도 고기를 잘 다루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안정복(1712~1791년)이 쓴 ‘동사강목(東史綱目)’에 나오는 부여의 돼지 이야기다.

“(전략) (부여는) 육축(六畜)으로 관직의 이름을 지어,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견사(犬使,) 대사자(大使者), 사자(使者)가 있다. 읍락(邑落)에는 토호[豪]가 있어, 백성을 하호(下戶)라 하여 (후략)”

부여의 연맹체를 구성하는 중심세력 중 하나는 저가(猪加)였다. ‘저(猪)’는 돼지다. 때로는 ‘시(豕)라고도 한다. ‘가(加)’는 윗글에 나타나는 대로 지역을 다스리는 이, 즉 족장(族長)이다. 돼지 토템을 지닌 부족의 족장이 바로 ‘저가’다. 부여인들의 돼지는 집에서 기르는 돼지가 아니라 산속 멧돼지일 가능성이 크다. 멧돼지든, 기른 돼지든 돼지는 부여사람들 곁에 있었다.

고구려 시대에도 돼지가 등장한다. 제사상에 돼지를 사용하고, 결혼 예물로도 등장한다.

중국 ‘북사(北史)_고구려(高句麗)’ 편이 전하는 고구려의 결혼 풍습이다.

“혼인에 있어서는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 바로 결혼시킨다. 남자 집에서는 돼지고기와 술만 보낼 뿐이지 재물을 보내 주는 예는 없다. 만일 여자 집에서 재물을 받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들은 모두 수치스럽게 여기며 ‘딸을 계집종으로 팔아먹었다’고 한다.”

낭만적이다. 서로 사랑하면 결혼시킨다. 재물을 받지 않고 돼지고기와 술 정도가 예물(?)이다. 고기는 귀하지만 아주 드문 식재료는 아니었다. 돼지고기와 술은 재물은 아닌 예물이다. 고급 음식이었지, 귀한 물품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부여, 고구려는 기마민족의 나라다. 기마민족의 풍습은 따뜻한 곡창지대로 넘어오면서 변한다. 고려 역시 백제, 태백산맥 지역을 통하여 기마민족의 피를 물려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마민족의 특성은 사라졌다. 고려인들의 돼지 다루는 솜씨는 서툴렀다.

 

경북 예천 고향식당의 양념 돼지고기 석쇠구이.
경북 예천 고향식당의 양념 돼지고기 석쇠구이.

◇ 거란과 몽골의 고려 침략과 고기 문화 전래

고려 시대 고기 문화는 두 차례 한반도에 전래한다. 한번은 거란 침략기고 또 한번은 몽골 침략기다. 거란 역시 고기 문화를 가진 나라였다. 북방 기마민족인 거란과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면서 고기 문화도 자연스럽게 한반도로 들어온다.

삼국시대 무렵 큰 도시였던 경주와 가야에는 난생설화가 전해진다. 경주는 계림(鷄林)이다. 닭의 도시다. 가야의 김수로왕도 마찬가지. 알에서 태어났다. 닭이나 새다. 돼지, 소, 개 등과는 거리가 있다. 호남지역은 백제, 고구려, 부여의 피를 받았다. 기마민족의 피다. 엉뚱하게도 한반도의 남쪽은 기마민족과 농경민족의 피가 뒤섞인다. 끊어졌던 기마민족의 고기 문화는 기마민족의 침략으로 다시 이어진다.

조선 초기 기록이다. 세조 2년(1456년) 3월,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의 상소다. 북방 기마민족의 고기 문화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전략) 대개 백정을 혹은 ‘화척(禾尺)’이라 하고 혹은 ‘재인(才人)’, 혹은 ‘달단(<97C3><977C>)’이라 칭하여 그 종류가 하나가 아니니, 국가에서 그 제민(齊民)하는 데 고르지 못하여 민망합니다. (중략) 또 전조(前朝) 때, 거란(契丹)이 내침(來侵)하니, 가장 앞서 향도(嚮導)하고 또 가왜(假倭) 노릇을 해 가면서, (후략)”

화척은 양수척이라고도 불렀다. 천민이다. 재인은 묘한 단어다. 이들이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재주도 부렸다. 광대 패의 시작이 백정집단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 달단은 더 묘한 단어다. 달단은 타타르 혹은 타르타르다. 터키, 동유럽의 북방 기마민족과 연관이 있는 민족이다. 생고기 스테이크를 타타르 스테이크(tartar steak)라고 부른다. 우리 육회와 닮았다. 이들은 모두 소를 도축하거나 동냥질, 도둑질한다. 자기들끼리 모여 살고 전국적으로 흩어져 있다. 굶주리는 이들이 늘어나면 도둑이 된다.

뿌리는 거란 혹은 거란 주변의 기마 민족들이다. 이들은 거란의 고려 침략 시기, 한반도로 들어왔다. 침략군 혹은 침략군의 앞잡이로 고려에 들어온 이들이 전쟁 후 그대로 고려에 눌러앉는다. 할 줄 아는 것은 사냥과 도축. 사냥으로 잡은 짐승을 도축하고, 그걸 먹거나 내다 판다. 부족하면 도둑질이다.

몽골인들도 마찬가지다. 제주도에 목장을 만들어 말을 키우고 고기 문화를 전한다. 그들은 일상적으로 먹던 고기다. 고려 사람들도 이들을 따른다. 사람, 문화가 같이 들어온다.

돼지고기 이야기는 다음 회로 이어진다. 그 전에 돼지 이야기를 조금 더 잇는다. 내 추억 속의 돼지고기는 축구공이다. 시골에서 돼지를 도축하면(불법으로) 오줌보가 나온다.

오줌보에 물을 채워서 축구공 대신 찼다. 물이 찰랑찰랑한 ‘가죽 축구공’으로 한나절씩 놀았다. 오줌보 축구공을 자주 찼으면 오늘날 훌륭한 축구선수가 될 수도 있었을 터이다.

불행히도 시골 마을의 돼지 도축은 일 년에 네댓 번이었다. 축구공이 없었으니 실력이 늘 수 없었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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