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섭변호사
박준섭 변호사

메디치가는 15세기에 모직물 공업조합과 금융업을 통하여 부호가문이 되었고 당시 공화정이었던 피렌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르네상스의 움직임은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 등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먼저 일어났지만 그 중에서도 피렌체는 르네상스를 이끈 중심이었고 메디치가는 그 피렌체를 만들었다. 메디치 가문의 시조인 코시모는 동서양을 합하고 세계제국의 수도가 되고 싶어 했다. 코시모는 찬란하던 고대 로마의 부활이라는 큰 목표를 세우고 이를 위해 인문주의 운동과 예술의 부흥을 실천했다. 또 코시모의 손자 로렌초는 플라톤 아카데미를 만들어 인문주의운동을 후원하였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선발하여 위대한 화가의 길을 걷게 했다. 그가 문예 부흥에 투자한 금액은 40만 프로란에 달하는데, 이를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최소 3천억원에 이른다고 한다. 결국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이 주문한 예술품들로 도시 곳곳이 가득 채워졌다. 피렌체는 당대 유럽최고의 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르네상스의 기원을 돌아볼 때 반드시 가봐야하는 세계적 도시가 되었다.

또 파리는 르네상스 시대 이후에 이탈리아 여러 도시에 비하여 예술의 변방이었다. 프랑스를 중앙집권국가로 만든 루이14세가 국가적 차원에서 예술을 집중육성하면서 파리 예술은 압축성장을 하였다. 그는 르네상스에 이어 바로크 예술을 창조함으로써 예술의 중심이었던 로마를 따라잡기 위하여 로마에 아카데미 본원을 설립했다. 그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영재를 선발하여 교육시켰고 뛰어난 화가를 선발하는 살롱전도 열었다. 그 결과 로마에서도 인정받는 수준급 화가들이 배출되었다. 루이 14세는 이탈리아 유학파인 르브륑으로 하여금 베르사이유 궁을 건축하게 하였다. 르브룅은 총길이 670m에 달하는 이 궁을 지으면서 전쟁의 방, 대계단, 거울의 방의 상들리아, 천정화 등을 기획하여 만들었다. 파리는 드디어 세계가 주목하는 건축물과 예술품을 갖게 되었다. 근대 프랑스의 패스트팔로업 문화정책은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혁명기를 지나 나폴레옹의 시대에 이르자 로마의 수준이 근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파리의 살롱전 출신의 예술가들은 로마와 비슷한 작품을 만들어낼 뿐 더 이상의 발전은 없었다. 그저 로마와 비슷한 그림을 만들 뿐 파리는 로마를 결코 뛰어넘을 수 없었다.

형식화되고 보수화된 파리의 살롱전에서 낙선한 화가들에게서 불만이 터져 나오자 나폴레옹 3세는 1863년에 결국 낙선한 작품들만 모아서‘낙선전’을 열었다. 낙선전에 출품한 마네를 비롯한 작가들이 후에 모네, 르누아르 등 인상파화가라고 불리는 작가들이 되었다. 쏟아지는 눈부신 빛의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파리는 마네와 모테, 세잔 르누아르로 시작하여 고호, 고갱에 이르는 고난의 긴 여정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새로운 미래를 제대로 창조할 수 있었고 세계 예술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대구는 언제부터인가 문화·예술의 도시를 표방하고 있다. 미술관, 음악당, 도서관 등 다른 도시에 있는 모든 건축물이 대구에도 다 있지만 어디를 돌아보아도 세계적으로, 아니 전국적으로 내세울만한 건축물이 하나도 없다. 뛰어난 예술품도 소장하고 있지 않다. 메디치가가 한 시기에 현재돈으로 3천억원을 예술에 투자한 것과 루이 14세가 관주도로 예술을 진흥한 이후에 인상파의 혁신이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제 대구시는 예산부족만을 탓하지 말고 선택과 집중을 하여 공공건축물에 예산을 집중투입하고, 예술품을 적극 구입하여 예술가를 지원하는 방안을 고려하여야 한다. 유럽역사의 교훈으로부터 그들이 한 자원과 집중과 열정의 몰입을 배워야 한다.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는 이때에 대구시가 진정한 문화·예술의 도시가 되기 위하여 메디치 가문과 루이 14세가 되는 현대적 모습이 과연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여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