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봄이 쳐들어오는구나 혁명처럼 목련이 피고 목련이 후두둑 지고 동백과 개나리 진달래 잇달아 피고 복숭아꽃 살구꽃 수수꽃다리…. 차례를 기다리고 눈부신 봄볕에 부드럽고 은밀한 봄바람에 천지가 꿈틀대며 기지개를 켜는구나 아아, 봄이 불가항력으로 진주해 와서 구악과 폐습을 무찌르는구나 천지는 시시각각 혁명이로구나 그래서 언제까지 늙지를 않는구나. 모든 감았던 눈까풀이 열리고 눈부시게 눈부시게 보는구나 나무 줄기마다 수액이 흐르는 소리 보리밭 푸른 갈기를 흔들며 달려가는 바람 높이 떠 지저귀는 종달새 밭 어귀 샛노란 배추꽃 유채꽃 노랑나비 흰나비… 이십 년 전 삼십 년 전 사십 년 전 봄이 온갖 그리움과 설렘과 아픔과 회한으로 물밀어 오는구나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한 줌 잿가루가 되기 전에 밝게 눈부시게 보라고 봄이구나 인생이여 천지여 무얼 감추고 숨기겠느냐 명명백백 백일하에 드러나는구나 껍질을 벗고 알을 깨고 나오는구나 생명의 신비의 비밀들이 낱낱이 열리는구나 부화하는 길이여 보라고, 봄이구나” - 拙詩 ‘보라고 봄이구나’

다시 4월입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시인도 있었지만 잔인한 것은 4월이 아니라 사람일 뿐입니다. 눈부시게 꽃들이 피고 연초록 광휘의 새잎이 돋는 4월은 가장 찬란한 달입니다. 눈 있는 자들은 누구나 보라고 다투어 꽃들이 피고 가지마다 새 움이 돋습니다.

보라고 민들레가 핍니다. 세상에 낮고 천한 것이 어디 있느냐고, 골목길 담장 밑에도 피고, 오폐수가 흐르는 시궁창 가에도 피고, 아스팔트나 보도블록의 틈에서도 핍니다. 자신의 처지가 바닥이라고, 사는 일이 고달프고 치욕이라고, 비관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보라고 민들레가 핍니다. 그래도 생명이란 은총이라고 민들레가 활짝 웃고 있습니다.

거창한 것만이 행복은 아니라고 양지꽃이 핍니다. 크고 화려한 것들에 기죽고 초라해질 필요가 없는 거라고, 상대적 박탈감 따위로 의기소침해서 어둡고 우울한 사람들은 보라고 봄볕에 반짝이며 양지꽃이 핍니다. 작다고 사소한 것이 아니며 흔하다고 천한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줍니다. 봄볕 하나면 족하다고 무덤가나 봄 언덕에 양지꽃이 피어서 세상 한 귀퉁이를 환하게 밝힙니다. 양지꽃 이웃에 제비꽃도 핍니다. 오랑캐꽃, 앉은뱅이꽃, 병아리꽃, 장수꽃, 반지꽃, 여러 이름으로 불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생긴 모습대로 핍니다. 키가 작다고 비관하지 않고 누구를 닮으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보라색이면 보라색인 대로 하얀색이면 또 그런대로 염색을 하거나 성형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이웃인 양지꽃과 많이 달라도 서로 다투거나 배타적인 감정 따위 가지지를 않습니다.

봄꽃 중에 상당수는 장다리꽃이지요. 무 배추로 담근 김치는 날마다 먹으면서도 무와 배추의 장다리꽃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봄에 심은 무 배추를 그대로 두면 장다리가 나와서 꽃이 피지요. 그 씨를 받아서 다시 심으면 가을의 김장거리 무와 배추가 되고요, 사람들은 무 배추를 채소로만 생각하지만 정작은 장다리꽃이이야말로 본연의 모습입니다. 아지랑이 아롱거리는 봄날 밭머리에 노랗게 핀 장다리꽃이 가장 배추다운 모습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명성이나 감투에 가려진 것이 사람의 참모습이 아니란 것도 잊고 살지요. 부와 권세와 명예를 쫓다가 자기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보라고 장다리꽃이 핍니다.

모든 나쁘고 아픈 기억과 상처들을 지우고 다시 시작하라고, 겨우내 삭막하고 앙상했던 산과 들을 온통 신록이 뒤덮고 있습니다. 얼어붙었던 대지를 뚫고 일제히 폭죽처럼 터져 나오는 신생의 함성에 귀막고 눈 감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온갖 꽃과 신록이 형형색색 광휘를 내뿜는 생명의 축제를 한사코 외면하고 비탄과 절망에 빠져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눈 있는 자들은 보라고 다시 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