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머 씨는 걸을 수 있기 때문에 걷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좀머 씨가 자신이 걷는 이유를 말해준다면, 그런데 그 이유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무게를 가진다면 그 때는 어떡해야 하나? 우리는 때로 너무도 무책임하게도 다른 사람을 궁금해 하고 너무도 성급하게 그 사람을 판단하려 한다. 그런 점에서 정말 궁금해야 할 것은 ‘왜 우리는 이런 식인가’이다.

1. 나

오래전, 그러니까 거의 20년쯤 전에 나는 ‘좀머 씨 이야기’를 처음 읽었다. 아니 읽었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것이 한 두어 페이지를 읽고는 덮어버렸다. 그 이유는 순전히 이 문장들 때문이다.

“오래전, 수년, 수십 년 전의 아주 오랜 옛날, 아직 나무 타기를 좋아하던 시절에 내 키는 겨우 1미터를 빠듯하게 넘겼고, 내 신발은 28호였으며, 나는 훨훨 날아다닐 수 있을 만큼 몸이 가벼웠다. 정말 거짓말이 아니었다. 나는 그 무렵 정말로 날 수 있었다. ….중략…. 어쨌든 나는 그때 날 수 있었고, 내가 만약 외투의 단추를 풀고 그것의 양끝을 양손으로 잡아 주기만 했더라면, 바람을 타고 둥둥 떠다닐 수 있어서 학교 앞 동산에서 언덕 아래에 있던 숲 위로 거침없이 훨훨 날아다니다가, 숲을 지나 우리 집이 있던 호숫가로 날아가서, 우리 집 정원 위에서 멋지게 한 바퀴 선회하면, 날아다니기에는 이미 몸이 너무 무거운 우리 아버지, 어머니, 누나, 형들이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테고, 다시 호수의 반대편 제방까지 날아가 점심 식사 시간에 늦지 않게 집에 도착하기 위해서 마침내 우아한 몸짓으로 착륙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인용한 부분은 이 책의 첫 문단이다. 정확히 말해 난 딱 첫 문단만을 읽고 책을 덮어버린 셈인데, 그 이유는 이 두 문단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얇은 이 책의 딱 두 문단만으로도 나는 가슴이 벅찼고, 이 두 문단조차 감당할 수가 없었다. 너무 좋았으니까, 더 안 읽어도 될 만큼 너무 좋았으니까. 아마 더 읽었다면 내 심장은 아마 터져버리거나 멎어버렸을 것이다. 혹은 질투심에 부들부들 떨면서 오열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 이토록 아름다운 글자와 문장과 문단 앞에서 나는 심한 질투심에 사로잡혔고, 그래서 더 읽을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적확할 것 같다.

그 때 이 책을 그만 읽기로 한 것을 참 잘한 일이라고, 지금 다시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나는 이 책을 처음 읽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20년 전 그 때와 달리 어떤 질투심이나 열등감도 없이 이 책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할 따름이다. 그럼 어디 쉼 호흡을 하고 이 책을 다시 읽어볼까.

2. ‘나’

그런데 먼저, 문학 작품 특히 이 책을 읽을 때는, 이 작품의 서술자인 ‘나’에게 나의 감정을 일치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글자는 글자로만 흘러가버리고 공허만 남는다.

예컨대 처음 누군가를 지독하게 사랑해 본 사람은 ‘사랑’이 단순히 말이나 글자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온전히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진 사람이 사랑이라는 글자를 받아들이듯이 그렇게 이 책에 나의 감정의 주파수를 일치시켜야 한다.

감정의 주파수를 맞추려면 우선 이 소설의 서술자인 ‘나’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한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인 “오래전, 수년, 수십 년 전의 아주 오랜 옛날,”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중년의 나이를 가졌거나 아니면 그보다 더 많은 것 같다. (소설 속의 ‘나’와 작가가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소설을 썼을 때 작가의 나이가 40대 초반이었으니, ‘나’의 나이는 작가의 나이와 엇비슷할지도 모른다. 이런 ‘나’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부터 고등학교 4학년, 우리나라 학교 제도와는 다르니 나이로 치면 6살부터 14살 때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서술자가 그 8년 동안을 회상하는 이유는, 그 기간에 만난 좀머 씨 이야기를 하려하기 때문이다. 미리 말해두자면, 14살 이후 ‘나’는 더 이상 좀머 씨를 만나지 못하게 된다. 여하튼 이 소설을 읽기 위해서 우리는 6~14살 때의 ‘나’의 감정에 우리의 감정을 일치시켜야 한다.

3. 좀머 씨

그럼 이 소설의 표제이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좀머 씨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좀머 씨는 항상 걸어 다니는 사람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1년 365일 하루도 안 쉬고 매일 매일 걸어만 다니는 사람이다. 어딜 그렇게 바쁘게 싸돌아 다니냐고 물으면 좀머 씨는 이렇게 대답한다.

“…. 아주바빠서이제학교 뒷산을 올라갔다가…. 호수를 빨리빨리 지나서…. 오늘아직시내에도꼭가보아야하고…. 너무바빠지금당장너무바빠시간이없어….”

한마디로 말해 좀머 씨는 이상한 사람이다. ‘나’는 6~14살까지 좀머 씨를 총 네 번에 걸쳐서 만나고 이 소설은 그러한 네 번에 걸친 좀머 씨와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다.

먼저 첫 번째 만남은 ‘나’가 아버지와 함께 경마장에서 돌아오는 길에서다. 그 날은 우박이 쏟아지는 몹시 험상궂은 날이었고, 그런 날에도 좀머 씨는 여전히 걷고 있었다. 아버지는 좀머 씨를 차에 태워 주려고 하지만 그는 한사코 거부한다. 아버지가 그러다 죽겠다고 말하자, 좀머 씨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두시오!”

두 번째 만남은 ‘나’가 카롤리나 퀴켈만이라는 여자 아이에게 바람을 맞은 날이다. 퀴켈만은 방과 후 ‘나’와 함께 걸어서 집으로 가기로 했는데, 그래서 온갖 준비를 다해 뒀는데 퀴켈만은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한다.

‘나’가 풀이 죽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전히 ‘시계의 초침처럼 빠른 속도’로 걷는 좀머 씨를 만나게 된다.

세 번째는 ‘나’의 피아노 선생님인 미스 풍켈로부터 모욕적인 꾸중을 들은 후다. ‘나’는 세상을 버리기 위해 오직 미스 풍켈지나친 다그침을 들은 후이다. ‘나’는 세상 전체가 ‘불공정하고 포악스럽고 비열’하게 느껴져 자살을 결심하고는 가문비나무 숲에 올라가 떨어져 죽으려고 한다. 그 때 좀머 씨가 숲에 나타나 쉬려고 한다. 좀머 씨는 사람이 없는지를 살핀 후 긴 한 숨을 내쉬는데 그 소리를 들은 ‘나’는 죽기를 포기한다. ‘나’는 좀머 씨의 한숨을 통해 그의 고뇌를 읽을 수 있었고, 그 고뇌의 무게에 비해 자신이 죽으려는 이유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가 마지막으로 좀머 씨를 본 것은 어느 날 밤, 호수로 걸어 들어가는 좀머 씨를 본 후이다. ‘나’는 좀머 씨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좀머 씨의 고뇌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4. 물음

이제 질문을 할 차례다. 그 질문은 왜 좀머 씨는 계속 걸어 다니는가,여서는 안 된다. 좀머 씨가 걸어다니는 이유는 이미 이 책의 초반부에 나와 있다. ‘좀머 씨는 밖에서 돌아다녀야만 하는 것이니까 밖에서 돌아다녀야만 돼….’(42면) 즉 좀머 씨는 그냥 그런 사람이다. 그러니 좀머 씨가 걷는 이유보다는 왜 우리는 좀머 씨가 걷는 이유를 자꾸 알려고 하는가,에 대해 물어야 한다. 결국 알지도 못할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우리는 왜 좀머 씨를 좀머 씨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꾸만 좀머 씨를 판단하려고 하는가에 대해서 물어야 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우리에게 ‘우리는 왜 나와 다른 누군가를 판단하려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