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룡서예가
강희룡 서예가

고산 윤선도(1587∼1671)는 ‘고산유고, 봄의 의미에 대한 책문(對春策)’에서 ‘태극이 쪼개지고 음양이 나뉜 뒤 추위와 더위가 서로 밀어서 네 계절이 생기는데, 해는 황도의 별자리에서 운행이 끝나고 달은 열두 달 뒤 운행이 끝나서, 해와 달의 도수가 마감이 되면 한 해가 다시 시작되는데 이것을 봄이라고 한다. 봄과 관련된 날은 갑을이고, 봄의 임금은 태호(太<769E>)이며, 봄의 신은 구망(句芒)이라 한다. 봄은 무성하고 온화한 기운이 온 세상에 가득 피어 올라와 오로지 뭇 생명의 고동을 울려 만물을 이뤄 자라나게 하는 것을 일삼기 때문에 봄의 작용은 낳음(生)이다. 여름은 자람(長)이고 가을은 이룸(成)이며 겨울의 갈무리(藏)에 간여하지는 않지만 이른바 자람, 이룸, 갈무리가 낳음이 아니고서 어떻게 작용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봄은 네 계절을 두루 꿰뚫고, 만물이 바탕으로 삼아 시작되며, 한 해의 머리가 되는 것이다, 라고 봄의 의미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사람이 하늘을 본받는 도리로써 말하자면, 다른 데서 구할 수 없고 인(仁)이라는 한 글자에서 구할 수 있을 뿐이다. 일원(一元)이 흘러서 시간에 부여된 것을 봄이라 하고 사람에게 부여된 것을 인이라 한다. 시간상의 봄이 곧 사람에게서는 인이고, 사람의 인이 곧 시간상에서는 봄이다. 인을 얻으면 봄과 부합하고, 인을 잃어버리면 봄과 상반되니, 봄과 부합하면 온화한 기운이 이르러서 만물이 자라나고, 봄과 상반되면 사나운 기운이 응하여 온갖 재앙이 일어난다고 한다.

비록 그러하나 이 봄은 사계절을 통털어서 시작이 되고, 이 인은 사단(四端)을 통괄하여 근본이 된다. 이 봄은 만고에 변하지 않으니 이 인은 천 년을 흘러도 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간의 봄을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나에게 있는 인으로 돌이켜야 하고 시간의 봄을 체득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나에게 있는 인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인으로써 도를 닦고 정치를 행하여 인을 행하는 공이 쉬지 않고 오래 지속되어서 온 사방에 영향을 주어 두루 관통하면 온 세상이 인으로 돌아가니 한 나라가 인을 일으키고 백성이 화평하고 만물이 자라나며, 온 세상이 봄이어서 저마다 제자리를 얻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가만히 앉아서도 성대한 세상으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사상가 순자도 자연의 변화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적극적으로 자연의 변화원리를 파악해 거기에 적응하고 문명을 일궈내고 문화를 창조할 것을 강조했다. 사람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에서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간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제 사람의 삶은 태어남과 죽음 그것만 자연스럽고 나머지는 모두 인공과 인위의 조작 속에서 이뤄진다. 노자는 자연을 불인(不仁)하다고 했다. ‘천지는 불인하며, 만물을 풀개(芻狗)로 여긴다. 노자의 사상은 자연은 만물을 만들어내서 제각기 자기 생긴 대로 살아가도록 두되 절대로 어느 하나를 특별히 배려하거나 더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가에서는 춘하추동의 흐름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자연스러운 정감을 도덕으로 추상화하고 이를 자연의 질서에 적용했다. 그리하여 유가사상에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인의 덕이 된다고 만물을 소생시키는 봄의 위대한 작용으로 연결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인간의 의식 바닥에는 자연에 대한 원초적 신화의식이 깔려 있어서 자연의 우호적인 측면은 부모의 자애로 여기고, 자연의 비우호적인 측면은 부모의 꾸짖음으로 여긴다. 이런 의식이 없었다면 우리는 봄을 찬미하는 온갖 음악과 축제, 그림 등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자연을 법칙으로 파악해 문명을 일궈가는 것도 인간의 숙명이지만 자연의 의미를 엿보고 삶의 의미를 넓고 깊게 하는 것도 인간 삶의 진실한 한 모습이다. 물욕에 젖어 사는 현대인들에게 사계절의 자연이 주는 교훈을 새삼 깊게 들여다보고 마음을 가다듬어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야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