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모여든 관람객들. /Jason Scott

지난해 1천20만 명의 사람들이 루브르 박물관을 찾았다. 전년과 비교했을 때 20%가 증가한 수다. 하루 평균 3만 명 넘게 루브르를 방문했고, 그 중 65%가 외국인이다.

2018년 한국을 방문한 전체 외국인 수가 1천534만 명 정도라고 하니 루브르가 가진 브랜드 파워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박물관 하나로 벌어들인 입장료 수입이 대략 1억7천340만 유로 정도로 추산, 어림잡아 2천230억 원이 넘는다. 입장료만 계산했을 때 그 정도이고, 출판물, 레스토랑, 아트상품 등의 판매 수익까지 합하면 상상을 초월한다.

그 뿐만 아니다. 프랑스는 루브르를 해외로 수출까지 했다. 루브르는 하나의 상품이 되어 아랍에미리트로 수출되었고 2017년 11월 루브르 아부다비가 문을 열었다. 루브르는 이름을 빌려주는 대가로 5억2천5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5천966억 원에 육박하는 금액을 챙겼다. 거기에 전시기획과 작품대여료, 운영 노하우 전수 명목으로 7억4천700만 달러(8천489억 원)가 추가로 지불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는 루브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루브르에서 세계 각국의 유물들과 19세기 중반까지의 미술을 감상한 방문객들은 센 강을 건너 오르세 미술관으로 향한다.

파격적인 건축으로 명소가 된 퐁피두센터.
파격적인 건축으로 명소가 된 퐁피두센터.

오르세 미술관은 원래 1900년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를 위해 기차역사로 지어진 건물이다. 1939년까지 파리와 남서부 프랑스를 연결하는 기차역으로 사용되었다. 기차의 도착과 출발 시간을 알리기 위해 역사를 장식했던 거대한 시계가 미술관이 된 지금도 하나의 상징이 되어 벽면에 걸려있다. 프랑스인들답게 과거의 작은 흔적 하나라도 가치 없이 버리지 않고 문화로 축적시켜 역사적 상징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기차역으로의 기능을 다해 도시의 흉물로 전락할 처지에 놓이게 되자 미술관으로 활용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문제는 ‘파리의 역사를 품고 있는 기차역을 어떻게 미술관으로 탄생시킬 것인가?’하는 것이었다.

기차역의 건축적 원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미술관으로서 기능하는 건축물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제였다.

뿐만 아니라 허물고 새로 짓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예산이 들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고 역사적 정당성 그리고 문화적 가치를 충족해야 하는 등 넘어야할 산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오르세 역사 건물은 처음 지어졌을 당시의 최첨단 기술과 재료였던 철골과 유리가 그대로 보존되어 미술관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반구형 천장의 유리창들은 미술관에 필요한 자연광을 충분히 공급해 주었고, 기차선로와 플랫폼이 있던 공간은 대전시실과 개별 전시실로 재구성되었다.

이렇게 태어난 오르세 미술관은 단순히 미술관으로서의 기능만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건축역사의 생생한 현장이자 역사적 건축의 증언이 되었다. 1986년 미테랑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오르세는 미술관으로 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미 유수한 미술관과 박물관이 존재하는 파리에서 오르세는 미술관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었을까? 그 비밀은 컬렉션에 있다.

미술관의 정체성은 소장품을 통해 드러난다. 루브르는 고대에서 부터 19세기 중반에 이르는 방대한 유물과 미술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오르세의 차별화 전략은 소장 작품을 특정 시기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루브르에서 고전 미술을 경험한 관람객들이 이어지는 시기의 작품을 만날 수 있도록 오르세는 모던클래식 작품들을 소개한다. 마네, 모네, 쿠르베, 르누아르 등 현대미술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미술가들의 주옥같은 걸작들을 전시하면서 오르세는 문을 열자마자 파리의 명소로 떠올랐다.

기차역을 개조해 문을 연 오르세 미술관.
기차역을 개조해 문을 연 오르세 미술관.

프랑스인들은 허물고 새로 짓는 것보다 훨씬 많은 예산이 소요되는 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옛 역의 모습이 보존된 지금의 미술관을 탄생시켰다. 가성비에 목을 매는 우리식 사고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접근방법이다.

과거의 흔적이 문화가 되고, 문화가 상품이 되기까지는 그에 상응하는 시간과 노력 그리고 투자가 불가피하다. 루브르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연간 오르세 미술관을 찾는 방문객 수는 300만 명에 이른다. 이정도면 역사를 보존한 프랑스의 비효율적인 선택이 옳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루브르에서 고전미술을, 오르세 미술관에서 현대미술의 태동을 경험했다면, 자연스레 또 다른 미술관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다. 바로 퐁피두센터이다. 루브르를 현대화하고 기차역을 개조해 오르세 미술관의 문을 연 것이 미테랑 대통령의 업적이라면, 퐁피두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1969년에서 1974년까지 프랑스 대통령을 지낸 조르주 퐁피두의 공적이다. 퐁피두센터는 배수관과 통풍구의 파이프를 외장으로 드러낸 파격적인 건축으로 유명하다. 이탈리아 출신의 건축가 렌초 피아노와 영국의 건축가 리처드 로저스의 합작품이다.

퐁피두센터는 현대건축의 패러다임을 바꾼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예술 정신이 어떻게 도시의 미래를 결정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복합 예술 공간으로 구성된 퐁피두는 1977년 1월 31일 완공되었고, 1997년에서 1999년까지 2년 간 보수 공사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누적 관람객이 1억5천만명이 넘는다.

오르세 미술관의 소장품이 고전미술의 균열을 일으키며 현대미술을 이끌어낸 거장들의 작품들에 집중되어 있다면, 퐁피두센터는 1914년 이후 나타나는 미술 현상을 담아낸다.

현대미술을 혁명한 마르셀 뒤샹을 비롯해 피카소의 큐비즘, 키네틱 아트의 선구자 장 팅겔리, 우리 모두를 예술가로 선언한 독일의 거장 요셉 보이스 등 동시대 미술의 담론을 끌어내는 곳이 퐁피두센터이다. 파리에 공존하는 여러 미술관들이 서로 불필요한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분명한 특성을 가지며 도시 내에 거대한 망을 형성하여 관광객들을 끌어 들이는 거시적 안목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파리에는 지금 언급한 3개의 미술관 이외에도 130여 개가 넘는 크고 작은 미술관, 박물관이 존재한다.

이들도 결코 시시한 미술관들이 아니다. 그랑팔레, 피카소미술관, 로댕미술관 그리고 2014년 문을 연 루이뷔통 미술관도 포함되어 있다.

파이프가 그대로 드러난 건축물 그 자체가 이미 탁월한 미술작품인 퐁피두센터.
파이프가 그대로 드러난 건축물 그 자체가 이미 탁월한 미술작품인 퐁피두센터.

다른 나라로 옮겨 놓으면 국보급 대접을 받을 만한 미술관들이다. 국가와 도시와 지역 사회가 오랜 시간 문화와 예술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 결과 나라의 격이 높아졌고, 이것이 지금의 파리라는 브랜드를 만들어냈다. 아름다운 작품들로 채워진 미술관들이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예술에 대한 조예가 있건 없건 파리를 찾는 모든 관광객들은 미술관을 찾는다. 아니 찾을 수밖에 없다. 관점을 달리하면 미술관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세계인들이 파리를 갈망하는 것이다.

먹고 살기 바빴던 시절, 문화와 예술은 배부른 사람들의 여유로 여겨졌던 적이 있다.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문화와 예술이 산업이 되었다. 이제 문화를 향유하지 못하고 예술에 대한 조예가 없다는 것은 곧 사회적 고립과 소외를 뜻한다.

예술 없이 굴뚝에 연기만 피어오르는 도시를 방문하고 싶은 사람은 지구상에 아무도 없다. 심지어 그런 곳에 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우리의 문화예술 정책이 제자리를 맴도는 동안 선진국들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치밀하게 탈산업사회를 준비하고 있었고, 그 결과가 지금의 차이를 만들어 놓았다. 미세먼지,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맹독성 산업분진’이 연일 우리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상황에 처하니 씁쓸함이 더할 뿐이다.

/김석모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