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재발견 소설가 김별아의 신라정신의 원류와 본질을 찾아서
믿음의 길 - 불국사에서 석굴암까지

불국토를 꿈꾸던 천 년 신라의 유적 가운데 가장 많은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는 불국사. 그 아름다운 모습 중에서도 좀처럼 보기 어려운 설경은 백미로 꼽힌다. /이용선기자

나는 ‘믿는’ 사람이 아니라서 ‘믿음’의 경로를 잘 모른다. 하지만 믿음이야말로 인간의 고유한 마음이며, 그 마음이 지극해지고 신실해질 때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비를 발휘한다는 것은 안다.

지금은 탑과 당간지주, 주춧돌과 장대석 등의 치석재로만 남아있지만, 신라시대 월성 주변에는 황룡사를 비롯해 분황사, 미탄사 등 사찰들이 하고많았다. 법흥왕14년(527) 스무 살을 갓 넘긴 청년 이차돈이 자신의 몸을 던져 서라벌에 꽃비를 뿌린지 17년이 지나자 “(서라벌에) 절과 절들은 별처럼 벌여 있고, 탑과 탑들은 기러기 행렬인양 늘어섰다.(‘삼국유사’)”

 

불국토사상의 선봉은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운 자장으로 일컬어져
원효와 의상을 거치며 이상이 아닌 현실로 신라인에게 뿌리내려
 
전생과 윤회·숱한 신비와 이적이 어우러진 불국사와 석굴암 
신라인들에게 불국사서 석굴암까지의 토함산 산행은 ‘믿음의 길’
신비롭고 아름다운 석굴암… 본존불은 물론 광배·백호 등 “완벽”

월성의 주인들은 꿈꾸었다. 신라가 불국토(佛國土)가 되기를, 그들이 전륜성왕으로 남기를. 부처님의 나라, 부처님의 가르침이 넘치는 땅이 불국토다. 전륜성왕은 통치의 수레바퀴를 굴려 세계를 통일하고 지배하는 이상적인 왕이다. 신라의 왕들은 세속의 전륜성왕으로 자신의 나라를 불국토로 만들고자 하였다. 무력이 아닌 정의에 의해서만 천하를 지배하기에 괴로움이 없으며 지극히 안락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종교적인 의미만은 아니었다. 폐쇄적인 씨족사회였던 신라를 개방하고 개혁하기 위해 새로운 믿음이 필요했다. 사회를 통합하는 통치 이념으로도 긴요했다. 하지만 사람을 강제로 울릴 수는 있어도 강제로 웃기기는 어렵다. 믿음은 쥐어짜는 눈물보다 터지는 웃음에 가까운 것이다. 불교가 정착하기까지는 이차돈의 ‘순교’가 필요할 만큼 토착 신앙의 저항이 컸다.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한 뒤 최초로 세운 사찰인 흥륜사의 절터가 굳이 신라인들이 신성시하던 천경림(天鏡林)이었던 까닭도 종교를 넘어선 정치 투쟁의 과정이었다.

신라가 곧 불국토라는 불국토사상의 선봉은 선덕여왕12년(643) 당나라에서 귀국해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운 자장으로 일컬어진다. 자장은 신라의 원시 신앙인 오악숭배를 오대산신앙으로 도입해 신라인들에게 자부심과 긍지의 믿음을 심었다. 이후 원효와 의상을 거치며 불국토사상은 이상이 아닌 현실로 신라인에게 뿌리내렸고, 마침내 부처님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호국사상으로 발전했다.

아무래도 마땅찮다. 불신자(不信者)의 손으로 쓰면 건조한 역사적 사실의 나열일 뿐이다. 1973년에 관광지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포장된 도로를 따라 불국사 주차장에서 석굴암 주차장으로 이동하는 방식으로는 그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월성의 주인들이 드나들던 사찰인 불국사에서 왕실의 신전과 같던 석굴암까지 오르는 데는 맨몸에 두 발이어야 마땅하다. 땀을 흘리며 허위허위 걸어 올라야 비로소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석굴암을 관람한 후 밝힌 소감처럼 “내 안에도 부처님이 계시구나!”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아, 정말 아름답다!”

아들아이가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을 보며 환호한다. 대여섯 살 때쯤 가족여행을 와서 전 국민의 포토존인 청운교 백운교 앞에서 찍은 사진이 있건만 무릎 아래 기억 따위가 남아있을 리 없다. 연신 감탄을 터뜨리며 사진을 찍어대는 아들 곁에서 신라의 대표 효자 김대성의 마음을 생각한다. 불교에서 부모와 자식은 8천겁의 인연이라 했던가? ‘삼국유사’의 설화에 의하면 불국사는 그가 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석불사)은 전생의 부모를 위해 지은 절이다.

김대성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경덕왕 때 국왕의 행정적인 대변자인 중시(中侍)로 임명되었던 김대정(金大正)과 동일 인물이다. 한편 절의 기록에는 불국사를 처음 창건한 김대성이 공사 중 죽자 나라에서 완성해 끝마쳤다고 하고, 조선시대 ‘불국사고금창기’에는 이차돈이 순교한 이듬해(528)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이 절을 창건하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기록이 상치되고 연대가 혼동된들 어쩌랴! 애당초 전생과 윤회를 비롯한 숱한 신비와 이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그저 신라인들의 신비를 믿고 싶은 마음과 이적을 꿈꾸는 열망을 되새기면 그만이다.

불국사 정문 매표소 옆으로 길이 하나 있다. ‘석굴암 가는 길’ ‘불국사길’ ‘석굴암길’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2.2㎞에 이르는 산길이다. 이 길을 오르려고 굳이 무거운 등산화를 챙겨왔다. 물 한 병과 사탕 몇 개도 준비했다.

“얼마나 걸릴까?”

“산길에서 2킬로 한 시간이니까, 그 정도 걸리겠는데요?”

아들이 등산화 끈을 힘껏 졸라맨다. 우리 모자는 백두대간 남한 구간 632㎞를 함께 종주한 동지이자 동료이다. 그때 질풍노도의 중2였던 아들은 예비역 복학생이 되었고, 마흔 고비였던 나는 지천명의 시기를 넘어섰다. 그럼에도 우리가 함께했던 대장정의 기억은 산을 오를 때마다 되살아난다. 문제는 아들이 오르막 내리막에서 힘에 부쳐 쩔쩔 매는 나를 그때의 쌩쌩한 젊은 엄마로 오해하는 것이다.

“이 길은 너무 빨리 가면 안 돼. 사방을 살피고 하늘도 보며 천천히 가야 해.”

입구에서 1킬로 남짓까지는 경사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평탄하다. 차량 출입은 금지되어 있지만 자동차도 너끈히 다닐 정도로 널찍하다. 길가의 나무들도 잘 다듬어져 있는데 겨울이라 마른 가지가 앙상하지만 안내판을 보니 불국사 청년회에서 심어 가꾼 단풍나무다. 가을에 오면 황홀하도록 아름답겠다. 봄이면 동자꽃, 은방울꽃, 물봉선화 등이 피고, 가을이면 작살나무, 범의부채, 누리장나무 등이 열매 맺는다고 한다.

이 길이 월성의 주인들이 걷던 바로 그 길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자동차를 타고 불국사 주차장에서 석굴암 주차장까지 이동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석굴암에 닿는 길이 찻길밖에 없습니까?”

1992년 한국을 방문한 영국의 찰스 왕세자는 석굴암을 관람한 후 안내자에게 물었다고 한다. 그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고행을 택했던 부처의 내력을 알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3백여 개가 넘는 화강암을 산꼭대기까지 운반해 쌓고 다듬어 장엄한 석굴사원을 지은 신라인들의 믿음 앞에 오체투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몸을 낮춘 산행으로 예의를 표하고 싶었나 보다. 숲길이 있다는 답을 얻어낸 찰스 왕세자는 이후 일정을 취소하고 불국사와 석굴암을 잇는 길을 걸어 내려왔다고 한다. 때마침 토함산 단풍이 한창인 11월이었다니, 먼 나라 왕세자의 걸음걸음도 울긋불긋 아름다웠을 것이다.

1995년 석굴암과 불국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고, 불국사에서 석굴암까지 도보로 이동하는 관람객과 승용차로 이동하는 관람객의 동선이 분리 정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쉽고 빠르게 눈도장을 찍고 돌아서는 관광이 선호되는 듯, 우리가 불국사-석굴암-불국사를 왕복하는 동안 산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재미있는 것은 경주 현지인으로 보이는 등산객들이 아니라면 어떻게 알고 왔는지 신기한 서양인 여행자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이다. 때로 그들이 보는 것을 우리가 보지 못한다. 겉보기에는 멀쩡한 눈을 가졌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처럼, 익숙함에 속아 우리 곁의 보물을 놓치고 있는지도.

 

불국사 정문 매표소 옆에서 시작되는 석굴암 가는 길. 4월의 새순이 돋아나기 시작하는 울창한 숲길이 매력적이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불국사 정문 매표소 옆에서 시작되는 석굴암 가는 길. 4월의 새순이 돋아나기 시작하는 울창한 숲길이 매력적이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절반쯤 지나고 나니 갑자기 경사가 가팔라진다.

“좀 천천히 가자! 엄마 힘들다.”

토함산은 암산(巖山)이기는 하지만 해발 745m로 그다지 높고 험한 편은 아니다. 그런데 너무 오랜만에 산행을 해서인지 오르막이 벅차다. 엄마의 체력 저하를 엄살이라 여기는 아들은 처음에 좀 기다려 주다가 이내 성큼성큼 앞서 나간다. 전생과 이생의 부모를 모두 섬긴 김대성의 효심을 녀석에게 기대하기는 어렵다. 현대의 부모는 자력갱생해야 한다.

“와! 여기 전망이 정말 좋아요!”

아들의 탄성에 고개를 돌려보니 발아래 경주평야가 진진하게 펼쳐져 있다. 석탈해는 토함산 정상에서 호공의 집이 있던 월성 부지를 발견했다는데, 아무리 산 정상에 올라도 월성이 보일 정도는 아닐 것 같다.

체험한 바 평지 걷기와 산행이 다른 점은, 평지를 걸으면 생각이 돋아나고 산을 타면 생각이 지워진다는 것이다. 산행은 운동이라기보다 명상이다. 게다가 토함산은 오악 가운데 동악(東嶽)이라 하여 중사(中祀)를 거행하며 호국의 진산으로 신성시했던 산이다.

그러니 신라인들에게 토함산 산행은 기도였을 것이다. 월성의 주인들은 불국사에서 석굴암까지 오르는 짬짬이 다리쉼을 하며 그들의 영지와 백성들의 삶터를 굽어보았을 것이다. 기도는 자연스럽게 일신의 복록을 비는 것을 뛰어넘어 나라의 태평과 안녕으로 번졌으리라. 사찰에서 신전까지, 이 길은 바로 ‘믿음의 길’인 것이다.

길 끝에 석굴암 주차장이 있다. 매표소 앞에서 시간을 확인하니 딱 45분 걸렸다. 신라인들의 마음을 곱씹으며 걷기에 무리하지 않은 일정이다.

석굴암은 언제 보아도 신비롭고 아름답다. 본존불 자체를 비롯해 광배와 백호와 주변에 둘러선 십대 제자들까지, 인간이 만든 예술품에 ‘완벽하다’는 말이 쓰일 수 있다면 석굴암에 그러할 것이다. 그토록 잘생기고 음전한 부처님은 싯다르타가 태어난 네팔에서도, 가는 곳마다 사원과 스투파(탑)가 널려있던 인도에서도, 일본이나 한국의 다른 어떤 사찰에서도 만나지 못했다. 아름다운 것이 주는 경외감 앞에 절로 머리가 수그러진다. 아들과 손을 모으고 삼배를 바친다.

이전의 잘못된 복원으로 결로와 이끼가 심각해지면서 결국에는 완전 밀폐되어버렸지만, 본래의 석굴암은 석굴 안으로 들어가 본존불 주위를 한 바퀴 돌며 참배하는 방식이었다. 일 년에 딱 하루 부처님 오신 날에는 신자들에게 본존불 주변을 한 바퀴 도는 방식의 참배가 허용된다니 아쉽고 안타깝다.

석굴암에서 불국사로 돌아오는 버스가 매시 정각 출발한다는데 시간을 맞추지 못해 놓쳤다. 무릎에는 좋지 않겠지만 내려오는 데는 올라가는 시간의 절반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참 좋다!”

“참 좋네!”

산속의 공기는 차갑고 무릎은 시큰하지만 마음만큼은 부듯하다. 지금 우리에게 그러하듯 신라 사람들의 삶 또한 마냥 평화롭고 행복했을 리 없다. 긴장과 갈등, 고통과 분노, 절망과 패배는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겪는 업보일지 모른다. 그토록 뜨거운 불의 집, 화택(火宅)에 살며 불국토가 현현하길 간절히 빌었던 1천2백여 년 전의 마음이 믿음을 모르는 어리석은 내게마저 아련히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