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나이 들어 세상과 인간을 들여다볼라치면 문득 허망해질 때가 있다. 인간과 세상에 드리워진 선명한 모순의 그림자 때문이다. ‘사랑’과 ‘이차돈의 사’를 읽으면서 어린 시절 나는 춘원(春園)의 필력에 감읍했다.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극복하고 지고지순한 사랑과 지극한 도에 이르는 인물을 형상화하는 대가의 솜씨. 훗날 그가 봉은사에 칩거하며 썼다는 반성문 ‘산중일기’도 친일부역의 흠집을 지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때의 망연자실함이라니!

15-16세기 신성로마제국 신민(臣民)으로 거부(巨富)가 된 야코프 푸거(Jakob Fugger)라는 인물이 있다. 푸거는 아우그스부르크의 평민 출신으로 젊은 시절 베네치아에서 금융과 복식부기를 배운다. 유럽의 근대 혹은 르네상스를 열어젖힌 요소로 우리는 원근법, 대학, 아르스 노바, 기계시계, 금속활자 등을 거명한다. 하지만 일상생활과 긴밀하게 연결된 복식부기를 빼놓을 수 없다. 루카 파촐리(Luca Pacioli)는 1494년 ‘산술집성’에서 복식부기를 다룬다.

파촐리가 이론적으로 복식부기에 접근한 수도사이자 수학자였다면, 속세의 장사치 푸거는 세계교역의 중심지 베네치아에서 복식부기를 배우고 익힌 인물이다. 근대적인 은행업의 본산 베네치아에서 장사에 눈을 뜬 푸거는 제국의 변방 아우그스부르크가 좁다하고 활동영역을 넓혀간다. 직물업, 은행업, 광산업에 손대고, 정치와 종교와 결탁하여 고리대금업도 마다하지 않는다. 1525년에 타계했을 때 그가 소유한 부는 유럽 총생산의 2%에 이르렀다고 한다.

헝가리 구리광산을 경영하면서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착취하고 노동 선동가를 처형하는 악행도 서슴지 않은 푸거. 그는 마인츠 대주교 선정과 관련하여 교황 레오10세와 결탁해 면죄부 판매이익 절반을 챙기기도 한다. 고로 루터의 종교개혁 여파로 발생한 독일농민운동 (1524-1525) 과정에서 푸거가 공격의 표적이 된 것은 이상하지 않다. 정작 이상한 일은 그토록 돈에 집착한 푸거가 세계최초의 사회복지주택 ‘푸게라이(Fuggerei)’를 지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1521년에 5만㎡ 부지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집단거주시설을 건설한다. 두 채의 집으로 시작한 푸게라이는 오늘날 67동의 건물 142가구를 포괄한다고 전한다. 푸게라이 거주요건은 가톨릭 신자로서 하루에 세 차례 기도를 하고, 연 0.88유로의 집세를 내면 된다고 한다. 1년에 1천300원의 집세로 거주 가능한 녹지(綠地)와 아늑한 방과 마당이 딸린 집단거주시설! 푸거는 그런 시설을 500년 전에 생각해내고 구현한 인물이다.

그의 동시대인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가 1516-1517년에 그린 푸거의 초상화를 보면 뭔가 짚이는 것이 있다. 이지적으로 보이는 넓고 단단한 이마, 먼 곳을 응시하는 단호한 두 눈, 얇지만 꼭 다물려 있는 입술, 강력하게 발달한 굵고 두툼한 목. 그가 입고 있는 검정색 겉옷과 자줏빛 숄은 거부의 옷차림이 아니라, 경건한 수도사나 구도자의 옷처럼 보인다. 돈으로 한평생 정치와 종교를 주무르고, 세계최고 갑부가 된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라도 하지 못한다는 가난구제에 나서서 ‘푸게라이’를 지은 모순적인 행태를 보인 까닭은. 뜬금없이 500년 전 유럽인 이야기를 꺼낸 것은 우리가 아직도 낯설어하는 보편적 복지나 토지공개념 같은 공적 영역의 담론과 실천부재 때문이다. 유럽의 보편적 복지나 무상교육을 부러워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부자 되세요!’라는 구호에 귀를 기울인다. 그것은 여지없이 청와대 대변인의 사퇴와 장관 후보자 낙마(落馬)로 허망하게 종결된다.

삼성총수의 개인주택 2채의 공시가격이 736억원이며, 보유세 합계만 12억원이라 한다. 돈 많이 벌어 호화로운 집을 사지 않고, 가난뱅이들을 위해 공공주택을 지은 푸거와 현저한 대비(對比)가 아닐 수 없다. 이참에 한국의 부자들, 권력자들, 지식인들은 조금만이라도 돌아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