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속도

영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의 공안부의 간부와 배관공은 이런 대화를 한다. 배관공으로부터 대화는 시작된다.

“그 거북이 분명 어디서 본 건데….”

“생각 안 나나?”

“분명 어디서 봤는데….”

“산다는 건 생각나지 않는 게 늘어가는 걸지도 몰라.”

“왜 그런 말을 하시나요.”

“아니, 그냥.”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인생이라는 건 생각나지 않는 게 늘어가는 것. 어?…. 이게 아니잖아.”

망각의 속도는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빠르다. 그러하다면 ‘생각나지 않는 것이 늘어가는 것’이 삶이 아니라 그러한 말조차도 잊어버리는 것이 삶일 것이다. 근사한 말의 ‘세부’가 아니라 근사한 말을 했다는 ‘느낌’만을 어루만지며 사는 것이 삶의 진짜 모습일는지도 모른다. 헌데, 그 세부를 잊어버려서 기억을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그 세부가 그리 대단할 것이 없기 때문에 기억을 안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세부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그 ‘느낌’만을 부여잡고 살려는 것인지도….

기실 근사한 것은 그 ‘세부’가 아니라 그 ‘느낌’일테니까. 하여 한 때 잘 나갔노라고 떠벌리는 사람들이 그 세부를 이야기하지 않는 까닭은 그 세부를 잊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세부가 별반 대단할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추억은 디테일이 아니라 그 잡히지 않는 아련한 것들을 원료로 하므로 그러하다.

△증상

스트레스를 받거나 신경이 날카로울 때면 턱이 민감해진다.

이런 증상이 생기면 공교롭게도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일을 하기가 어렵다. 미간에 손가락이 다가올 때 느껴지는 저릿한 느낌을 턱으로 느끼는 셈이긴 하지만, 이 느낌은 훨씬 강하고 강렬하다. 마치 날카로운 칼이 턱의 살과 뼈를 베고 지나가는 듯 선뜩하다. 날카롭건 뭉툭하건, 멀리 떨어져 있건 가깝건 턱 언저리에 있다고 느껴지기만 하면, 그것들은 모두 칼로 변해서 턱을 서늘하게 노린다. 모든 감각기관이 오직 턱에만 집중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턱으로 인지하고 지각하게 된다.

책을 읽을 때는 책의 하단 모서리가, 글을 쓸 때는 노트북의 모서리가 턱을 겨눈다. 이 지랄맞을 지랄지랄한 느낌 때문에 몇 번이고 턱을 손으로 쓸어내리거나 손으로 턱을 가려야 한다. 이런 지경이니 어떤 일이든 잘 될 턱이 없다.

△슬픔

죽음은 슬프다. 죽은 자가 다시 삶의 세계로 돌아올 수 없으므로 슬프다. 그 슬픔은 죽은 이의 것이 아니라 산 자의 슬픔이다. 죽은 자는 죽었으므로 산 자의 슬픔을 느낄 수 없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죽은 자는 다시 죽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죽음은 유일하며 또 유구하다. 죽음은 비록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이지만, 그 죽음은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삶 속에서 완성된다. 그런 점에서 죽음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고유하다.

하지만 완성되지 않은 죽음은 어떠한가? 원하지 않은 죽음들, 완성되지 않은 죽음들, 사소한 사고, 또 홀로코스트와 같은 처참한 죽음, 그리고 세월호…. 이러한 죽음은 어떻게 위로되는가? 슬픔이란 감정은 이러한 죽음에게 보내는 조사(弔辭)다. 슬픔은 당신과 나, 죽은 자와 산 자,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 차안과 피안을 향해 나아간다. 아니 죽은 이들의 넋을 위무하며 동시에 그 불완전한 죽음을 완성하기 위해 슬픔은 뻗어가고 있다.

이제 다시 삶을 알겠다. 죽은 이가 다시 죽을 수 없듯이 산 자는 삶을 멈출 수 없다. 오직 쉼 없는 것만이 삶이다. 그러므로 삶의 연장선에 죽음이 있을 리 없다. 삶은 삶이고 죽음은 죽음이므로 죽음과 삶은 연속적일 수 없으며 죽음과 삶은 결코 만날 수 없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죽음 속에서 죽음을 완성시키며 삶 속에서 삶을 연속시킨다. 슬픔은 삶과 죽음에 취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유일함에 취해 있고, 죽음의 고유함에 취해 있다. 하여 슬픔은 크고 높은 것들의 한 부분이다.

△왜 하필 그런 일을 하시죠?

혹 당신이 애매한 일을 하고 있거나 그런 유의 학과를 다니고 있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왜 하필 그 일을 하게 되었죠? 이런 질문을 던지는 상대는 십중팔구 당신의 직업이 실용적이지 안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며 실용적이지 않다는 말은 돈이 안 된다는 말과 정확히 일치한다.

나의 경우, 왜 국문과를 가셨죠, 문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따위의 질문을 듣는다. 이 질문에 적절하게 답하고 싶다면, 오히려 대답의 내용보다는 질문 자체를 분석하는 편이 낫다. 우선 당황하지 말고, 그 물음이 어떤 상황에서 던져진 것인지, 그런 질문을 던진 상대방의 성향은 어떤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의 답은 늘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낸 사람에게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오답은 오답이기 때문에 오답인 것이 아니라, 출제자가 요구하는 답이 아니기 때문에 오답이다.

예컨대 초등학교 시험 문제에 이런 것이 출제된 일이 있다. 사슴이 손에 거울을 들고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고 있다. 그 그림 아래 “사슴이 ○○○ 봅니다”라고 적혀 있다. 빈칸을 채워야 했던 한 아이는 사슴이 ‘미쳤나’봅니다, 라고 썼다. ‘미쳤나’가 어떻게 오답일 수 있겠는가. 그 답은 출제 의도에 맞지 않을 뿐이다. 아이는 ‘봅니다’를 교육과정을 초과하는 수준에서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천재적이며, ‘미쳤나’는 학교교육과 시험제도의 한계를 향해 던지는 도발적 구호처럼 들린다는 점에서 전복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학교교육은 천재의 저항을 부추기기보다는 천재의 저항을 거세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배속에 숨기고 상대가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좋다. 이것은 상대의 비위를 맞추는 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상(李箱)은 극도의 권태 속에서도 ‘동공이 내부를 향하여’ 열리는 일을 자기 자신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다. 돈 꼴레오네가 다혈질의 소니에게 머릿속의 생각을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Don‘t let anybody outside of the family know what you’re thinking), 고 말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이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니까.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그러니 왜 국문과를 가셨죠, 따위의 말을 듣는다면 “저도 당신처럼 사업을 하였더라면 당신만큼 훌륭한 사업가가 되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먹고 사는 일로 난감해지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때는 치기어린 마음에 멋모르고 국문과를 들어가게 되어 후회가 막심합니다.”라고 말을 하라. 이 말을 들은 상대는 금세 우쭐해져 자신이 어떤 계기로 사업을 하게 되었고, 어떻게 돈을 벌게 되었는지 신나게 늘어놓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다고 고깝게 여길 것은 없다. 그는 자신의 외로움을 그런 식으로 떠벌리는 것으니, 당신은 측은지심의 인륜을 발휘하여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면 된다.

이런 유의 질문이란 늘 상대가 당신의 말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에 던지는 질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정답은 늘 질문자에게 있으니 질문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대답보다는 질문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파악하고 그가 듣고 싶은 말을 하라. 이것은 정답에 근접하는 일일 뿐 아니라, 훌륭한 처세의 전략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