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희 수필가
김순희
수필가

‘진달래는 바빠서 꽃부터 대뜸 피운다. 재거나 뜸들이지 않고 결론부터 말한다. 가지 끝에 여러 송이 분홍빛을 켜고 봄은 이래요 한다.’ 친구가 보내준 문자메시지다. 어느 사진작가가 한 말이라며 꼭 나를 두고 하는 말 같다고 했다. 봄꽃은 꽃을 먼저 피운다. 눈 속에 피는 매화를 시작으로 산수유, 목련, 벚꽃, 개나리까지 회색빛 가지에 푸른 물이 들기도 전에 꽃잎을 장식한다. 성질 급한 나와 닮았다.

그런데 며칠 전 아침신문에서 개나리나 진달래도 잎이 난 다음에 꽃을 피운다는 기사를 보았다. 새로 가지가 자라서 잎이 난 뒤에 꽃눈이 맺힌다. 그런데 막상 꽃을 피울 때가 되면 겨울이 닥친다. 꽃눈은 눈 속에서 겨울을 나고 따뜻한 봄이 되면 비로소 꽃이 된다. 그 꽃이 지고나면 나무는 겨울을 나려고 떨구었던 푸른 잎을 다시 만들어 입는다.

성질이 급해서가 아니고 더 많은 자손을 퍼뜨리기 위해서 미리미리 준비한 것이란다. 식물은 동물처럼 좋은 환경을 찾아 옮겨 다니지 못한다. 할 수 없이 꽃피는 시간이라도 달리해야 다른 식물과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 오랜 경험에서 꽃을 먼저 피웠건만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만큼만 본다.

결혼을 코앞에 둔 봄이었다. 남편이 나를 내려 주려고 우리 집 앞에 주차를 했다. 하루 종일 데이트를 하고 돌아온 시간인데도 헤어지기 아쉬워 차에서 두런거렸다. 그러다 앞에 세워진 차를 보며 내가 물었다. “우리 집 근처에 인천시장님이 사나봐.”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며 남편이 자세히 말해보라기에 앞 차를 가리키며 얼마 전부터 근처에 세워져 있는데 ‘인천시장 1234’라고 써 있지않냐며 얼굴에 물음표를 그려보였다.

남편은 한참을 웃고 나서야 설명해주었다. 그건 임시번호판이었다. 차가 출고된 공장이 인천에 있어서 인천시장이라 적는다고 했다. 울산시장과 창원시장 차는 못 봤냐며 껄껄댔다. 그때까지 우리 집엔 자가용이 없었다. 그래서 임시번호판이 뭔지 알지 못했다. 그런 내가 부끄럽기도 하고 무안하기도 했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세상을 본다.

초등학교 시절 O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읽었다. 그림을 공부하는 존시는 유명한 화가가 되겠다는 꿈도 이루지 못한 채 폐렴으로 죽어 간다. 창밖에 보이는 담쟁이 잎을 세면서 그 잎이 다 떨어지면 자신도 죽을 거라고 말한다. 마지막 잎이 떨어지던 날 밤, 이웃에 사는 베어만이 비바람을 견디며 인생의 역작을 벽에 남겼다. 그 그림을 담쟁이 잎으로 본 존시는 용기를 얻고 살아난다. 사람의 목숨과 담쟁이가 잎을 떨구는 것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지만 병에 못 이겨 약해질 대로 약해진 존시는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의미를 부여했다.

글을 읽고 궁금한 것이 있었다. 비가 오면 벽에 그린 그림이 지워질 텐데 어떻게 담쟁이 잎이 밤새 그대로 있었을까? 시골 초등학생이던 나는 그때까지 물감이라고는 수채화 물감 밖에 몰랐다. 물을 타서 쓰는 수채화물감으로는 비바람을 견디는 잎을 그려 낼 수 없었다. 글쓴이가 뭔가 착각을 했을 것이라고 여겼다. 눈을 뜨고도 제대로 보지 못하니 장님이나 다름없다.

지금 나는 당달봉사를 면해보려고 신문을 본다. 더 깊이 알고자 책을 읽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여러 강의를 찾아다닌다. 고전문학읽기를 몇 년째 참여하고, 지난해부터는 보드게임 동아리에 들었다. 그 흔한 블루마블 게임조차 구경도 못해 본 내가 한참 어린 회원들 사이에서 게임의 룰을 익히느라 머리에 쥐가 난다. 도형으로 심리 알아보기는 올 봄에 새로 시작한 공부이다. 동그라미, 세모, 네모, S 중에 하나를 선택하면 타고난 기질을 알게 된다. 봄 내내 사람에 대한 공부를 할 것이다.

문제는 오늘 하나를 머리에 저장하면 어제 배운 두 가지가 빠져 나간다는 사실이다. 뭐가 그리 바쁜지 금세 저버리는 봄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