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시 왕산기념사업회
13도 창의군 총대장 등 독립운동
허위 선생 탄생기념일 맞아

왕산 허위선생의 탄생기념일을 맞아 2일 왕산 허위선생의 사당인 경인사에서 낙성고유제와 위패 봉안식이 진행됐다. /구미시청 제공
구미시와 (사)왕산기념사업회는 2일 왕산 허위선생의 사당인 경인사에서 낙성고유제와 왕산 허위선생 위패 봉안식을 가졌다.

허위선생의 탄생기념일을 맞아 열린 이날 행사에는 기관 단체장 및 기념사업회 임원 등 50여명이 참석했다.

허위선생은(1855. 4. 2∼1908. 10. 21) 구미 임은리 출생으로 구한말 오늘날의 대법원장, 고종의 비서실장(대통령비서실장), 의정부 참찬 등 높은 관직에 있었으나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 나라를 빼앗자 전 재산과 관직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인물이다.

왕산 허위선생은 13도 창의군 총대장으로 지난 1908년 일본의 심장부인 통감부를 공격하기 위해 선발대 300명을 이끌고 ‘서울진공작전’을 진두지휘 했다. 서울시는 왕산선생의 13도 창의군 선발대가 통감부를 치기 위해 진군한 청량리에서 동대문간의 도로명을 ‘왕산로’로 명명해 그 업적을 기리고 있다.

또 허위선생 가문(구미)은 우당 이회영선생 가문(서울), 석주 이상룡선생 가문(안동)과 함께 형제, 자손까지 3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 3대 명문가로도 유명하다. 재산과 높은 관직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공로를 인정한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허위선생의 구국정신은 중·후기 독립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안중근 의사가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의 용맹한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국욕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높은 벼슬아치들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를 모르는 자가 많다. 그러나 왕산 그는 그렇지 않았다”고 했을 정도로 선생의 순국 후 독립운동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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