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휘논설위원
안재휘 논설위원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북방의 흉노족에게 억지로 시집을 간 중국 한나라 때 궁녀 왕소군(王昭君)의 심경을 헤아리며 당나라 시인 동방규가 쓴 시 ‘소군원(昭君怨)’에 나오는 대목이다. 우리 정치사에서는, 지금은 고인이 된 거물 정치인 김종필(JP)의 인용으로 유명하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서울의 봄’이 거론될 적에 전두환이 쿠데타를 감행하자 김종필은 ‘봄이 왔어도 봄 같지 않구나’라는 뜻의 이 말을 사용해 촌철살인의 어록을 남겼다.

또다시 ‘춘래불사춘’이다. 이 나라 국민 노릇 하기가 힘겹도록, 계절은 봄이로되 바람은 여전히 삭풍이다. 집권세력은 자기들 아집대로 정국을 끌고 가려는 강다짐을 놓지 않고 있다. ‘적폐청산’으로 포장된 포퓰리즘 정치보복은 끊임이 없고, 민생은 도무지 피폐의 암운을 걷어낼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북한 김정은의 ‘비핵화’ 약속은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를 허물기 위한 어설픈 사기극으로 귀결돼 문재인 대통령이 대략난감에 빠졌다.

그럼에도 권력자들의 오만방자가 하늘을 찌른다. ‘내로남불’의 신생 사자성어로 표현되는 이중인격적 언행들은 이미 여야를 막론한 정치권의 폐습으로 굳어졌다. 주야장천 상대방 쓰레기통 엎어놓고 냄새나는 ‘남 탓’ 퍼레이드만 벌인다. 도무지 달라지는 게 없다. ‘내가 잘해서’ 민심을 얻기보다는 ‘상대방 허점’만을 욱대겨서 거꾸러뜨리려는 악의만 무성하다.

문 대통령이 정권 중반기를 맡기겠다며 내정한 장관후보자들의 살아온 내력들이 가관이다. 자기들이 정한 7대 불가 기준에 이리저리 걸려있는 하자들이 화려하다. 국회에서 열린 청문회에서는 ‘능력 검증’ 따위는 시작조차 하지 못했고, 티 듣기와 육탄방어만이 난무했다. 검증받으러 나온 후보자가 제1야당 대표를 공격하는, 듣도 보도 못한 희한한 장면마저 연출됐다. 국회 장관후보자 청문회의 의미는 바야흐로 완전히 퇴색하고 말았다.

자유한국당이 외치는 ‘좌파독재’·’폭정’비판에 당장 흔쾌히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징후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음은 역연하다. 촛불 민심을 핑계 삼아 하염없이 끌고 가는 ‘적폐청산’ 드라이브를 ‘보복정치’·‘공포정치’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고 주장할 명분은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다. 김경수 경남지사의 구속 이후 벌어지는 여당의 무차별 판사공격은 이 나라 민주주의에 심각한 적신호다.

작금 일어나는 정치권 안팎의 이슈들도 그렇다. 문 대통령은 동남아순방에서 돌아오자마자 ‘버닝 썬’과 ‘김학의’와 ‘장자연’ 문제를 언급하며 특명을 내렸다. 자유한국당의 대표가 된 황교안과 문 대통령 가족 문제를 건드린 곽상도를 때려잡으려는 보복행위라는 것이 호사가들의 입방아다. 김은경 전 환경부장관의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서 이중잣대를 우겨야 하는 처지가 된 청와대에 이번에는 대통령의 입인 대변인의 부동산 투기 의혹이라는 핵폭탄이 터졌다.

한국갤럽이 지난달 26~28일 전국 성인 1천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문 대통령의 직무수행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응답자가 43%에 불과해 최저점을 경신했다. 부정적 평가는 46%였다. 부정평가의 이유로는 ‘경제·민생 문제 해결 부족’(36%)이 단연 으뜸이다. ‘북한 관계 치중·친북 성향’(16%)이 다음이었다.

민심은 시시각각 변한다. 정치를 제대로 하는 사람이라면 출렁거리는 민심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 잘못하고 있다고, 길을 바꾸지 않으면 큰일이 난다고 외치는 숱한 곧은 소리에도 정권은 야릇한 맹신에 빠져서 오기를 부리고 있다. 오만한 권력은 스스로 힘겨울 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 봄이 왔으되 도무지 봄 같지 않아서 더 슬픈 민초들의 삶을 좀 돌아보라. 봄이 봄 같이 느껴지는 따뜻한 나라를 제발 좀 만들어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