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귀연수필가
송귀연 수필가

바야흐로 봄이다. 이맘때면, 언 땅이 녹고 동면 들었던 벌레가 기어 나오며, 물고기들이 얼음장 밑을 돌아다닌다. 남편은 묵혀두었던 관리기를 꺼내 엔진이 부식되었거나 고장 난 곳이 있는지부터 점검했다.

우수가 지나면 밭갈이가 시작된다. 울퉁불퉁 했던 땅이 순식간에 갈아엎어지면서 부드러운 평면이 펼쳐진다. 기계가 해내는 작업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마법을 부리는 것 같다. 유박비료와 퇴비를 듬뿍 뿌리고 다시 한 번 갈아엎은 뒤 고랑을 만든다. 땅이 가르마처럼 정갈하게 양쪽으로 갈라진다. 다음은 비닐 씌우기이다. 작업순서가 바뀔 때마다 부속품을 교체하기만 하면 관리기가 척척 알아서 해준다.

감자심기는 대체로 3월 중하순경 시작하지만 우린 3월초에 심기로 했다. 대신 냉해를 대비해 이중 비닐멀칭을 할 예정이다. 이 방법은 처음 시도해 보는 것이지만 북쪽지방에서 고추재배 때 하는 방법을 응용해보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수확이 앞당겨진다. 감자를 일찍 캔 뒤 곧바로 고구마를 심을 계획이다. 늦어지면 심이 생겨 맛이 떨어지게 된다.

올해는 수미감자, 홍감자, 자주감자 등으로 골고루 섞었다. 웰빙, 다이어트 등 건강에 관심이 높아진 요즘엔 사람들이 다양한 색깔의 감자를 찾기 때문이다. 사과농사 뿐 아니라 밭작물도 재배하기에 잠시도 한눈팔 겨를이 없다. 때때로 고달프다 푸념도 늘어놓지만 이는 잠시 뿐이다. 다른 생각할 틈도 없이 일에 매진하다보면 그 가치가 참으로 소중하게 다가온다. 고진감래의 의미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것이 농사이다.

일 년 농사의 계획은 영농일지를 기록한 후 이를 활용한다. 지난해 이맘 땐 뭘 했는지, 어떤 병충해엔 무슨 방제로 효과가 있었는지를 일일이 정리해놓았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다. 정약용은 가난을 딛고 성실하게 일하는 농민의 모습을 노래한 ‘보리타작’이라는 농부가를 지었다. 그의 둘째아들 정학유는 ‘농가월령가’를 지어 농가에서 각 달마다 해야 할 농사일과 세시풍속, 예의범절 등을 꼼꼼하게 적었다. 이는 새롭고 가치 있는 삶을 평민들의 현실에서 찾고자 한 당시 지식인들의 경향을 엿보게 하는 자료들이다.

도연명의 ‘도화원’ 같은 이상향을 이곳 전원에서 꿈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마음이 멀리 있으면 사람 많은 곳에 있어도 그 곳은 산중과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나는 사람에 섞여서도 외로움을 느꼈다. 지난날 사소한 갈등으로 시간을 허비한 것이 후회스럽기까지 하다. 이곳에선 다툴 사람이 없어 마음이 편안하다. 전원생활은 늘 자연과 함께 하기 때문에 고요하고 평화롭다. 과수나 채소들은 때가 되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자연을 거스르거나 시간을 역행하지 않는다.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고 욕심을 버리게 한다. 작은 것에 만족해하며 유유자적하게 된다. 차가운 시멘트로 둘러싸인 아파트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행복감이다. 젊은 나이에 일찍 선택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아이들은 들어서자마자 소파에서 쿵쿵 뛰기도 하고 두 팔 벌리고 비행기놀이도 한다. 번개파워맨 옷을 걸친 손자가 이얍! 소리를 내지르는 모습에 모두가 폭소를 터뜨린다. 남편 역시 산기슭에 쓰러진 잡나무들을 끙끙거리며 실어 나르면서도 즐거운 표정이다. 전기톱으로 길이를 알맞게 자르고, 다시 정과 도끼로 쪼개어 장작을 만든다. 도끼질 하는 자세가 익숙한 자연인 같다.

남편이 모종삽으로 구덩이를 파면 감자의 씨눈이 위로 향하도록 해 얼른 집어넣었다. 그리곤 흙을 이랑보다 도탑게 덮었다. 그런 후, 이중멀칭을 위해 비닐을 덧씌웠다. 잡초와 햇볕을 동시에 해결하는 방편으로 가장자리는 검정, 가운데는 흰색인 비닐을 사용했다. 양쪽 끝에 둥근 모양의 철사를 40㎝ 정도의 간격으로 박은 다음, 바람에 잘 견디도록 흙으로 덮고 나자 작업이 끝났다. 포근한 바람이 볼을 어루만진다. 잘 발아하여 제대로 싹이 트기를 빌면서 뻐근해진 허릴 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