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룡 서예가
강희룡 서예가

충남 아산시 배방면에 ‘맹씨행단’이란 고택이 있다. 맹씨행단이란 말 그대로 맹씨가 사는 은행나무 단이 있는 집이란 뜻으로 조선 초기 세종 때 영의정으로 검소한 생활과 원칙에 철저한 학자로 명성을 높인 맹사성이 살던 곳이다. 이곳은 본래 고려 말 충절로 상징이 되는 최영 장군의 가옥이었는데, 최영과 맹사성의 할아버지와의 인연으로 맹사성은 그의 손녀사위가 됐다. 이후 맹사성이 물려받아 그의 집안이 살게 됐다.

조선선비의 실천은 학행일치로 시작한다. 배운 것은 행동으로 옮길 때 의미가 있는 것이므로, 입으로 아무리 거룩한 말을 해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면 비판하고 매도했다. 배운 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교묘한 말과 좋은 얼굴색을 지어 남과 자신을 속이는 짓을 ‘교언영색(巧言令色)’이라 하여 매도한 것이 바로 그 예이다. 또한 남에게는 후하고 자신에게는 박하게 하는 박기후인(薄己厚人)의 정신을 체질화하여 청빈하고 검약한 생활 방식을 자연스럽게 몸에 익혔다. 마음대로 다 쓰면 남는 여유란 있을 수 없으므로 자신을 위해서는 아끼고 절약해야 남에게 베풀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청렴 정신이 곧 청백리의 바탕이 된 것이다. 조선의 세종시대는 역사상 가장 진취적이며 창조적인 시대로, 사회정의가 구현되었다고 평가되는 청백리가 많이 배출된 시기로도 유명하다. 이 시기에 맹씨행단에서 우의를 다지며 청빈한 생활을 솔선수범한 그 대표적인 인물이 황희, 맹사성, 유관이다.

황희는 18년 동안이나 영의정의 자리에 있으면서 청백리의 귀감을 보여 줬다. 그가 영의정 재직 시 공조판서 김종서가 자기 소속 관아인 공조로 하여금 약간의 술과 유과를 마련해 정승과 판서를 대접하게 했다. 이에 황희는 ‘국가에서 예빈시(禮賓寺)를 설치한 것은 접대를 위한 것이니, 만약 시장하다면 예빈시로 하여금 음식물을 마련해 오도록 할 것이지 어찌 사사로이 제공한단 말이오?’ 예산 외의 경비 지출로 인한 부작용을 경계했던 것이다. 그 후 조정의 조회에 모든 대신이 비단옷을 입고 나왔는데 황희만 거친 베로 만든 관복을 기워 입고 나왔다. 그러자 다음 날부터 모든 대신이 헌 관복으로 갈아입고 출근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상징적인 인물의 일거수일투족이 관료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말해 준다. 그만한 인품과 인격을 평가받는 인물이기에 사치를 좋아하는 관료들을 감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맹사성은 부인이 햅쌀밥을 해 올리니 어디서 햅쌀을 구했느냐고 물었다. 녹봉으로 받은 쌀이 너무 묵어서 먹을 수 없으므로 이웃집에서 꾸어 왔다고 하자 부인을 나무랐다. ‘이미 국가에서 녹미(祿米)를 받았으면 그것을 먹을 일이지 이웃집에서 꾸어 와서야 쓰겠소?’ 공사 구별 없이 똑같이 엄격한 기준을 적용함을 확인할 수 있는 일화이다. 당시 병조판서가 좌의정인 그를 찾아갔다가 자신의 행랑채보다도 못한 그의 집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우의정을 지낸 유관은 비새는 단칸 초가집에서 베옷과 짚신으로 생활을 했다. 어느 여름, 한 달 이상 내린 비로 지붕이 새자 유관이 우산을 들고 부인에게 말했다. ‘우산도 없는 집에서 어떻게 견디겠소?’ 그러자 부인이 대답했다. ‘우산이 없는 집엔 다른 마련이 있답니다.’ 대부분의 관리가 우산 걱정할 필요조차 없는 집에서 살고 있는 줄 부부가 모를 리 없건만 시침을 떼고 대화하는 모습이 해학에 가깝다.이들은 맹씨행단에서 평생의 지기로 우의를 다지며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고 격려했을 것이다. 나아가 누가 더 청렴할 수 있는지 내기라도 걸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상호간에 교감된 투철한 공인으로서의 사명의식일 것이다. 속이 꽉 찬 사람은 허기증이란 있을 수 없다. 청빈이 부귀와 영화를 누릴 만한 충분한 권력과 지위를 가진 위치에 있는 이들에게 요구되던 미덕인 것이다. 지금의 관료사회는 영욕에 쪄든 목마른 자가 소금물을 마시고 있는 형국과 다를 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