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길수수필가
강길수 수필가

다시 삼월이 왔습니다. 삼월은 설렘입니다. 유년시절 삼월이 연록새싹으로 찾아왔었기 때문입니다. 산골 우리 둥지 앞 양지바른 밭두렁입니다. 얼어 죽은 풀잎뿐인 두렁을 삼월 명지바람이 간지럽히면, 해님이 질세라 따사한 손길로 어루만집니다. 어느새 새싹이 옹기종기 땅을 비집거나, 마른 풀잎을 들추거나 혹은, 돌 틈새로 솟아오르지 뭡니까. 올망졸망 해님을 찬미하는 연록새싹들에, 어린 마음은 무턱대고 설렜습니다. 새싹들의 그 무엇이, 그토록 유년의 내 마음을 설레게 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새 생명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풀들의 새싹이기 때문일까요. 갓 부화된 병아리라든가 갓 낳은 강아지와 송아지 같은 가축들과 함께 자랐지만, 그들은 귀엽거나 놀랍기는 해도 마음 설레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풀, 나무 등 녹색식물이 동물이나 미생물, 무생물보다 더 밀접한 무엇이 숨은 걸까요. 다른 아이들은 안 그런데, 나만 그랬을까요. 올 삼월도 어김없이 내게 찾아왔습니다. 한데, 올 삼월은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아니 언제부턴가 삼월은, 내게 시나브로 멀어지듯 다르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해마다 조금씩 변하며 오는 삼월이, 무슨 메시지를 건네는지 알 수 없습니다. 유년의 설렘이 가슴속에 그대로 남아있는데, 피부에 다가오는 삼월은 다른 모습인 것입니다. 어쩌면 삼월이 이월에게 자리를 내주거나, 포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세레나. 지난 이월 말일 이틀전날, 퇴근길이었습니다. 양지바른 블록담장아래 민들레꽃 한 송이가 피어있었지요. 그 옆엔 민들레관모송이 하나가 솜털과자로 한껏 부풀어 올라 봄바람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월동했을까요. 근처에 월동한 장미나뭇잎도 보였습니다. 지난 겨우내 살아 버티는 쑥, 씀바귀, 냉이, 클로버, 그리고 이름 모르는 풀들을 학교운동장 한편에 조성한 녹지 곁을 오가며 지켜보았습니다.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내 유년의 삼월은 긴 겨울잠을 막 깬 자연의 징표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달이었다는 것입니다. 갓 돋아나는 새싹이나, 눈 녹은 물이 졸졸 흐르는 개울가 버들강아지, 따사한 산비탈의 참꽃봉오리와 같은 존재들 말입니다. 그들과 친하다 보니, 저절로 가슴속에 설렘도 싹튼 게 아닐까요. 자연이 무엇인지 배우지 않은 어린 마음이, 주어지는 자연의 징표들과 나름대로 소통하게 된 듯합니다. 산골동네에 대대로 이어지는 삶의 현장은, 필연적으로 식물을 주로 쓰며 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할테지요. 식물을 의, 식, 주에 이용하며 사는 방식들은 자연히 도제제도(徒弟制度)가 되어 대물림하고, 내 유년도 그 마당의 구성원으로 놓이게 된 것입니다. 하여, 중학교 때부터 도시에 살면서도 주위의 식물들을 자주 바라보며 살았지요.

세레나. 올 삼월 한반도는, 미세먼지에 시달리며 시작했습니다. 불쑥불쑥 미세먼지 없는 곳으로 이사가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입니다. 중국의 공업화 전까지는 미세먼지로 휘달려 본 기억이 없습니다. 황사를 가끔 겪은 일은 있어도, 이렇게 심각한 미세먼지대기오염에 당하지는 않았어요. 과학적으로 충분한 검정 없이 전자파, 하천수질, 광우병 같은 사안들로 온 나라를 어지럽히던 시민단체들은 대체, 어디서 뭘 하기에 미세먼지에 대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을까요. 중국에 미세먼지문제를 항의 한번 제대로 못하는 정부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에, 침묵하는 다수의 국민은 분통 터집니다.

삼월에 새싹을 내던 식물들이 월동하거나 이월에 싹틔우는 기후변화와, 삼월의 심각한 미세먼지대기오염이란 시대징표들 앞에서 우리는 당하고만 살아야 할까요. 아직도 가슴에 생생히 살아있는 삼월의 설렘은, 정녕 부활할 수 없는 걸까요. 조국을, 겨레를, 삼천리금수강산을 마다하고 이민이라도 가야 하나요. 따지고 보면 기후변화징표도, 미세먼지징표도 인간이 저지른 카르마이지 싶습니다. 지구어머니의 건강을 조금도 배려않고, 물욕에만 눈 먼 인간의 자업자득 말입니다. 제발 푸른 지구행성을 함께 지켜내어 삼월의 설렘을 간절히 되찾고 싶은, 다시 온 올 삼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