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수
의성군수

미래 지방소멸 1위라는 고향 의성의 불명예는 군수(郡守)라는 자리에 있는 당사자로는 참으로 곤혹스런 말이다. 전국적으로 가장 고령화 지역임을 알고 있었고 또 그런 정책을 나름대로 준비해 왔지만 정작 중앙일간지에 떡하니 그런 기사가 나가고 보니 왠지 마음이 섭섭하고 슬그머니 주눅이 드는 것이다. 군수에 취임하고 군민에게 새로운 힘을 드려보고자 “활력 넘치는 희망 의성”이란 구호를 내걸었지만 이것이 뭔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하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활력 넘치는”이란 말은 어떻게 해 볼 자신이 있었지만 “희망 의성”이란 말은 뿌리없이 외치는 먼 메아리처럼 들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심경에 처해있던 내가 불현듯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어머니였다.

많은 인구소멸 위기의 지역들이 그렇듯이 의성도 한때는 인구 25만의 대형 농촌이었다. 그 당시 자식들은 대도시로 나가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 큰 출세의 기회처럼 받아들여지던 때였고 그로 인해 농촌사회는 점차 피폐해 지면서 젊은 인구가 줄어가고 말았다. 육남매를 둔 우리 식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머니는 가정형편이 넉넉지 않았지만 무리를 해서라도 도시로 도시로 자식들 유학(?)을 시키셨다. 그로 인해 당신은 금새 할머니처럼 변해가고 있었고 어린 내 눈에는 가끔씩 들르는 고향 모습까지 정말 초라해 보였다. 우리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으신 어머니는 그나마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으시지도 못했다. 당시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그러하셨듯 그저 헌신과 희생으로 점철된 일생을 사셨다. 지금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지는 이가 나뿐만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어머니가 그때 갑자기 나의 머리에 생각난 것은 ‘희망’이란 단어의 뜻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희망이란 절망의 반대말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말처럼 희망이란 절망하는 사람들을 위해 있는 말일까. 절망의 끝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힘없는 손처럼 막연히 기대하고 바라는 덧없는 형이상학적 용어에 불과한 것일까.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아는 희망이란 말은 그렇게 무기력한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나라는 생명이 잉태된 순간부터 누군가의 기대와 희망이었을 것이고 누군가의 삶의 보람이었을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서는 동물조차 목숨을 바쳐 지키는 분명한 본능이며 이유인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희망이란 존재에 앞서는 것이며 인류가 이제껏 달려온 역사의 방향이며 미래로 가는 지시등과 같은 말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잠시 왔다가 가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남겨둘 수 있는 영원한 말이며 영원한 가치가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자 잠시나마 기사를 보고 우울한 기분이 든 자신에게 슬그머니 울화가 났다. 지금은 인구가 줄어 휑하니 보이는 이 고향에서 부모의 희망을 안고 그렇게 고향을 떠난 수십만의 의성향우들이 여전히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으며, 그들을 위해 손마디가 굽도록 농사를 짓던 어버이들이 여전히 고향을 지키고 있는데 정작 군수란 자가 ‘희망’이란 뜻을 제 맘대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로운 성 즉 의성(義城)이란 지명을 만든 홍술장군이 백성들과 함께 결사의 항전으로 사수한 것도 결국 이곳의 ‘희망’을 지켜내기 위함이었고, 어머니가 그토록 힘들게 헌신하며 자식들을 바라지한 것도 ‘희망’이란 간절함이 그 속에 있었던 때문이 아니었던가. 즉 ‘희망’이란 단어는 지방소멸 1위라는 절망스런 단어에 좌지우지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앞선 가치와 힘이있는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 나는 ‘희망’이란 말을 군민 속에서 찾기 시작했고 더 적극적으로 지방소멸 1위라는 부정적인 말과 싸워나가기로 했다. 운이 좋았던 때문인지 우리 지역에서 귀농 귀촌이 대폭 늘어났고, 자랑스럽게도 컬링으로 올림픽의 큰 스타들도 우리 지역에서 나타났다. 최근에는 경북도의 지원을 받아 지방소멸 극복을 위한 사업지로 선정받게 되었고 이웃사촌 청년시범 마을 사업 유치와 함께 통합 출산 지원센터까지 개설하게 되었다. 정말 의성에 필요했던 젊은 사람들의 집단 귀농을 가능하게 하고, 그간 문제점이었던 출산과 보육까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 부정적이던 바로 그 지방소멸 1위라는 말이 되려 새로운 ‘희망 의성’의 돌파구가 된 셈이다.

또한 ‘희망’이란 말은 1+1=2라는 산술적 값이 아니라 방향과 크기가 있는 벡터값에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다. 마치 신앙인들의 기도처럼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어떤 것을 간절하게 바라는 노력하는 힘이며 서로에게 긍정의 에너지를 심어주는 행복 바이러스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희망은 판도라의 상자에 남겨진 마지막 말이 아니라 우리 곁에 항상 가까이에 있었는데도 우리 스스로 당연시 해버려 뒤늦게야 깨닫는 어머니의 마음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흔히 희망이란 결과에 치우쳐 이루지 못할 것 같은 목표에 비유하여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희망이란 결과적인 모습이 아니라 과정적인 노력의 뜻을 지닌 단어라고 생각한다. 김광규 시인은 ‘희망’이란 시에서 희망이란 어떠한 순간에도 항상 절망에 앞서는 것이며 어디선가 이리로 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우리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싸워서 얻고 지켜야 할 것이라는 표현을 했다. 참으로 공감이 가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나에게 있어 ‘희망’이란 절망의 반대말이 아니라 고향 의성에서 고향 사람들에게서 새로 배운 귀중한 의미의 단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