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아누이는 비극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게다가 비극은 무엇보다 편안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희망이, 그 더러운 희망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자기 등에 하늘을 온통 짊어진 채 결국 생쥐처럼 붙잡혔기 때문이며 그래도 신음하고 불평할 게 없고 외쳐 대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말하려고 했던 것, 한 번도 말해 보지 않았던 것, 어쩌면 아직 알지도 못하는 것을 있는 힘껏 소리 지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건 어떤 극적 반전을 시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 소용 없이 그저 스스로에게 말하고 자신이 그걸 알기 위해서다. 그런데 드라마 속에서는 거기서 빠져나갈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발버둥친다. 그건 비천한 것이고 유용성을 따지는 것이다. 비극에서는 유용성을 따지지 않고 무상으로 이루어진다. 비극에서는 발버둥쳐야 헛수고다. 결국, 시도할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안티고네’ 44~45면).

△순환논증의 비순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순환논증의 오류를 범하는 곳이 적지 않다. 이를 테면, “행동자는 필연적으로 성격과 사상에 있어 일정한 성질을 가지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이 양자에 의하여 우리는 그들의 행동을 일정한 성질의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와 같은 부분이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동자가 성격과 사상을 갖는 이유를 ‘필연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51면). 성격과 사상은 일정한 성질을 갖고 있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순환논증 중 가장 압권은 이것이다.

그런데 전체는 시초와 중간과 종말을 가지고 있다.

시초는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다른 것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 다음에 다른 것이 존재하거나 생성되는 성질의 것이다. 반대로 종말은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또는 대개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그것 다음에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성질의 것이다. 중간은 그 자체가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또 그것 다음에 다른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56면).

이 말을 정리하면, ‘시초’는 시초에 있는 것이고 ‘중간’은 중간에 있는 것이며, ‘종말’은 종말에 있는 것이다. 장난처럼 들리는 이 말을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처음-중간-끝’에 대한 간략하면서도 가장 적확한 정의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시초’란 다른 것 다음에 올 수 없는 것으로 모든 사건들이 응축되어 있는 특이점(singularity)이다. 여기에서부터 사건은 ‘분규’(스토리의 시초부터 주인공의 운명에 전환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108면)하면서 ‘급전’(사태가 반대 방향으로 변하는 것, 69면)과 ‘발견’(무지의 상태에서 지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 71면)을 포함하게 된다.

‘중간’은 ‘시초’와 ‘종말’을 그럴 수밖에 없도록 연결한다. 특정한 ‘시초’를 특정한 ‘종말’로만 이끌어가게 만드는 유일무이한 매개항인 것이다. 그리하여 사건은 완전히 닫히게 된다. 그 지점이 ‘종말’이다.

△인간의 급수 혹은 수용론

이러한 비극의 구조는 인간의 탄생과 죽음을 모방하고 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이 “행동하는 인간을 모방”한다거나,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고 있다는 것을 이 책 전체에 걸쳐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31면: 49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방이라고 부른 것은 인간의 삶 전체가 아니라 ‘행동하는 인간’에게서 일어난 중차대한 사건, 혹은 ‘급전’과 ‘발견’으로 인한 급격한 변화가 이뤄지는 삶의 한 부분을 모방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삶의 처음과 끝을 모르며 그 진행방향에 대해서도 예측할 수 없다. 그러하다면 행동하는 인간의 모방이라는 말이 가능할까. 우리는 우리의 삶의 방향을 모르기 때문에 급전이나 발견의 순간을 알 수 없다. 따라서 모방을 하려면 행동 중인 인간이 아니라 행동이 완료된 인간을 모방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진행 중인 사건이 아닌 이미 완료된 사건을 모방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완결된 행동[의] 모방”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행동이 완결된 것들은 모두 모방 가능한가. 꼼꼼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 역시 빼놓지 않고 “완결된 행동을 모방”할 수 있는 범위까지 언급하고 있다. 모든 인간이 아닌 “큰 명망과 번영을 누리는 자들 가운데 한 사람”, “[명망 있는] 소수의 가문” 중의 한 사람이다(79: 90면). 그 중에서도 “무서운 사건이 일어난 가문”을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90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일종의 수용론적 입장까지 고려하고 있는 듯하다. 관객이 전혀 모르는 사람을 관람객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관객이 이미 알고 있으면서 같이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할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던 것이다.

△모방의 논리

모방의 대상은 신화적 인물이나 영웅을 모방하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하지만 그는 대상의 삶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연성’을 중시한다.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 한다(62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개연성을 위하여 실제로 일어난 사건 중 불필요한 것은 버려도 좋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전체 중에[서] 아무런 크기를 가지지 않[는] 전체” 즉 “통일을 이룰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다(56면: 59면). 이러한 사건 속이 펼쳐질 때 “비극의 카타르시스”가 행해진다(49면).

이렇게 본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모방은 대상에 대한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묘사가 아니라 실제적인 사건의 조합과 배치에 가깝다. 그러한 조합과 배치의 지향점이 ‘카타르시스’일 것이다. 결국 비극의 모방이란 조합과 배치의 기술이라 할 수 있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카타르시스: 정화 혹은 배설

그렇다면 이 완성된 작품 속에 깃드는 ‘카타르시스’는 무엇일까.

카타르시스는 ‘정화’나 ‘배설’이라는 뜻을 갖는다. 정화는 더러운 것을 씻어낸 후의 결과를 말한다면 배설은 더러운 것을 씻어내는 행위를 말한다. 하지만 더러운 것을 씻어냈다고 해서 꼭 깨끗해진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배설이라는 말은 이보다는 더 의미심장하다. 배설의 논리는 이렇다. 우리의 몸은 이미 더러운 배설물을 가지고 있다. 배설물은 우리 몸이라고도 그렇다고 우리의 몸의 일부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배설물은 온전하고 완전무결한 우리를 구성하지 못하게 만드는 균열점이다. 다시 말하면 비극은 카타르시스를 통해 ‘나’라는 인식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묻게 만든다. 비극의 가치는 완고한 ‘나’를 주체가 아닌 비주체로 만들어내는 바로 거기에 있다.

*덧: 니체의 ‘비극의 탄생’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슬픈 감정은 축제에 참여한 사람들이 광란과 착란을 가라앉혀, 보다 이성적이고 침착하게 사유하도록 만든다. 성적인 것들이 삭제되고 금기시되며, 애도와 경건함이 축제의 중요한 형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축제에서 ‘축’을 분리하여 삭제하고 ‘제’의 기능만을 활성화시킨다. 그러한 ‘제의적’ 성격은 종교적 특징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스 비극의 역사는 감성의 영역을 몰아내고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를 구축해가는 시대로 이끌어가게 만드는 장치는 아니었을까. 남성중심적 그리스 사회가 고안한 남성적 장치는 아니었을까. 그리스 비극은 오늘날 삶의 비극으로 이행하게 만든 출발점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