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은 산 책이다
산책은 산 책이다
  • 등록일 2019.03.14 20:01
  • 게재일 2019.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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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산책을 하려고 날마다 들로 나간다. 마을 주변에 너른 들이 있어 발길 가는 데로 이리저리 걸어 다니다 오는 산책이다. 몸의 건강을 위해 걷기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양 팔을 크게 흔들며 빠른 걸음으로 걸어야 효과가 크다고 하지만, 별다른 목적이 없이 이것저것 해찰을 하며 느릿느릿 걷는 게 나의 산책이다.

산책은 말마따나 살아있는 책이다. 달마다 철마다 새로이 출간되는 계간지나 월간지다. 하루하루 촘촘히 들어있는 건 월간지이고 가끔씩 듬성듬성 읽는 사람에겐 계간지이다. 나는 거의 매일 빼먹지 않는 월간지 구독자다. 하루라도 밥을 먹지 않으면 허기가 지는 것처럼 어쩌다 산책을 하지 못한 날은 마음이 헛헛하다. 하루도 독서를 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는 안중근 의사의 경구를 실감하게 된다.

산책은 어렵지 않다. 삼척동자도 까막눈도 읽을 수 있고 백세 노인도 걸을 수만 있으면 읽을 수 있다. 걸을 수 없는 사람은 휠체어로도 읽기도 한다. 요즘은 전동 휠체어까지 나와서 더 편리해졌다. 산책은 난해하지는 않지만 누구에게나 똑 같이 읽히는 건 아니다. 아무것도 감추거나 속이지 않지만 시간과 장소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 내용이 다르다. 주마간산 건성으로 읽는 사람도 있고 자세히 정독을 하는 사람도 있다. 바쁘고 급한 사람에게는 잘 보이지 않지만 눈과 마음을 열어놓은 사람에게는 무궁무진 읽을거리가 많다.

산책은 어느 경전보다도 생생한 생명의 말씀이다. 과장이나 왜곡이나 허위가 없는 진리의 말씀이다. 병이 든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말씀이고, 지치고 좌절하는 사람에겐 용기와 활력을 불어넣는 말씀이다. 악성(樂聖)이라 불리는 베토벤은 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거르지 않은 산책으로 귀가 들리지 않는 절망을 이겨내었고, 철학자 칸트도 날마다 일정한 시간에 산책을 하는 것으로 위대한 사유체계를 이루었다.

지난 겨울에는 겨울마다 새로 연재하는 청둥오리와 겨울보리를 감명 깊게 읽었다. 해마다 비슷한 내용이지만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게 산책이다. 오로지 맨몸 하나로 먼 하늘을 날아와 얼어붙은 들판에서 겨울을 나는 청둥오리는 걸핏하면 죽네 사네 엄살을 부리는 인간들에 비해 얼마나 씩씩하고 꿋꿋한가. 겨울보리의 어처구니없는 막무가내는 또 어떤가. 남들은 겨울을 나기 위해 단단히 준비를 하는 늦가을에 막무가내로 싹을 틔우고, 발가벗은 어린아이 같은 여린 싹으로 겨울을 견디는 모습은 오소소 소름이 돋는 전율이요 충격이었다.

새로 나온 3월호 오늘의 페이지에는 연못가 버드나무가 눈길을 끈다. 앙상한 가지에 언제부턴가 보일 듯 말 듯 봄빛이 감돌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제법 연둣빛이 짙어졌다. 누군가가 날마다 묽은 연두색 물감을 조금씩 덧칠하는 모양이다. 마치 한 폭의 담채색 동양화를 보는 듯 가슴 설레는 이른 봄의 정경이다.

봄까치꽃과 광대나물도 한층 생기를 띠었다. 보통은 한해살이풀로 알려져 있지만 상당수는 죽지 않고 월동을 한다. 그 냥 죽은 듯이 동면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명주실 같은 겨울 햇살을 붙잡고 꽃을 피우기도 하는 걸 보면 그 맹목의 생명력에 아연하고 숙연해진다. 한갓 보잘것없는 풀꽃까지도 사는 데까지 살아있는 일에 도무지 핑계나 엄살이 없다는 걸 시리게 읽는다.

거대한 딱정벌레 같은 트랙터가 봄갈이를 하고 있다. 겨우내 묵혔던 벼논을 갈아서 햇볕과 공기를 쐬어 주면 굳어 있던 땅이 부드럽고 싱싱해진다. 완고하고 거칠어진 사람의 마음밭도 수시로 반성과 성찰의 쟁기로 갈아주어야 이해와 포용의 토양이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 그제가 경칩이었다. 옛날에 소가 끌던 쟁기와는 달리 트랙터의 쟁기질은 사납기 그지없다. 땅속에서 동면하던 개구리들이 저 무지막지한 횡포에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들판의 살아있는 읽을거리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 못내 안타까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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