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선생님께서 우리 학교에 와 주시면 안 되세요? 어떤 선생님도 우리말을 안 들어주세요. 무턱대고 거부부터 하세요. 제가 오늘 하루 종일 교무실이며, 특별실을 뛰어다녔는데 선생님들께서 짜증만 내시고, 어떤 선생님은 아예 교무실에 들어오지 말라고까지 하셨어요. 저희가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닌데, 학교와 학생들을 위해 봉사를 하겠다는 건데, 더군다나 새로운 부서를 만들겠다는 것도 아니고, 작년에 열심히 활동한 부서인데 말이에요. 정말…!”

올해 고등학교 고학년이 되는 학생과의 전화통화 내용이다. 학생은 “정말”이라는 말 다음에 뭔가 더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나,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학생은 그 학교 교사들보다 훨씬 더 현명했다. 동아리를 대표해서 시간이 날 때마다 교사들을 찾아다니며 부탁을 드렸을 학생의 모습을 생각이 안쓰럽고, 미안했다. 그리고 학생이 교사들에게서 받았을 창피와 모욕, 그리고 좌절을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마 학기 초라 선생님들께서 바빠서 그러셨을 거야. 그러니 다음에 정중히 다시 한 번 더 부탁드려 보렴. 열심히 했으니까, 너희들 뜻을 알아주시는 선생님께서 분명히 계실거야!”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비록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이 말 또한 형식적인 인사에 지나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필자는 한동안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학생에게 말의 죄를 지었다는 죄책감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지금 학교 현장의 분위기상 그 학생은 더 큰 마음의 상처를 받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설령 이 나라 교육 현실이 거지같다고 하더라도, 이번만큼은 기적(奇蹟)이라도 일어나기를 필자는 바랐다. 기적이 꼭 일어나서 그 학생이 학교와 교사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뢰를 제발 잃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

이제 우리 교육은 기적이 필요한 상황까지 와버렸다. 학생들이 학교 교육활동에서 교사들의 도움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교사들 또한 학생들의 발전을 자발적으로 돕는 일은 당연을 넘어 교사들의 의무이다. 그런데 이제 지극히 당연한 일조차 특별한 일이 되어버렸다.

안타까움에 “당연(當然)”의 뜻을 찾아보았다. “일의 앞뒤 사정을 놓고 볼 때 마땅히 그러하다.” 여기에서 필자는 우리 교육이 무너진 이유를 찾았다. 그것은 바로 지금 우리 교육에는 “일의 앞뒤 사정”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교육은 일의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앞뒤’란 ‘일의 중요성’이다. 적어도 필자가 학창시절 때에는 학생이나 교사나 일의 앞뒤를 분간했다. 학생에게 있어 우선 된 일은 교사를 존경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교사들은 최우선적으로 세상 무엇보다도 학생을 사랑으로 지도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무너졌다.

더 이상 학교의 교사는 학생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졸업을 위해서는 거쳐야 하는 학교라는 곳에서 월급받고 일하는 사람 정도로밖에 인식되지 않고 있다. 교사들에게 있어 학생은 자신의 모든 사랑을 쏟아부을 대상이 아니라 단지 직장에서 마주해야하는 업무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교육 현실이 이러한데 학교에 무슨 ‘교사 존경’과 ‘학생 사랑’이 있을까.

그런데 필자는 이 나라 교육이 이렇게 된 데에는 교사라 불리는 사람들의 책임도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이 학교 교육에 흥미를 잃게 만든 사람도, 그래서 그들이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를 제공한 사람도 바로 교사들이기 때문이다(물론 이 나라 교사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과연 이 나라에 진정한 교육이 존재하기나 할까? 우리 학교 현장에 학생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던 그 옛날 스승과 같은 교사들이 아직 있을까?

필자의 눈에는, 물론 스승도 계시겠지만, 필자를 포함해 이 나라 학교에는 교사라는 탈을 쓴 월급쟁이 직업인들밖에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