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도덕경’ 제5장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전복시킨다.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성인불인 이백성위추구.’ 간략하게 번역해보면 ‘하늘과 땅은 인하지 않아서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 성인은 인하지 않아서 백성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 천지를 다른 말로 바꾸면 자연이 된다. 인간을 둘러싼 자연에 내재한 불편부당과 무심을 강조하는 말이 천지불인이다. 노자의 사유에 따르면, 자연의 본원적인 속성은 ‘인하지’ 않다는 것이다.

2011년 3월 11일 일어난 동일본대지진은 진도 9.0의 강진으로 1900년 이후 네 번째로 강력한 지진이었다 한다. 1995년에 일어난 진도 7.8 고베지진의 180배 위력을 발휘했다고 하니 그 강도를 가늠하기 어렵다. 대지진의 여파로 사망-실종자가 2만 5천명을 넘고, 피해주민이 33만명을 헤아린다고 하니 지진피해가 흔치 않은 한반도 거주민의 상상을 뛰어넘는 재해다.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런 참혹한 자연재해가 왜 일어나는가, 하는 점이다.

지진으로 최고 20m 높이의 ‘쓰나미’가 발생하고, 후쿠시마 원자로 폭발로 대참사가 발생한 원인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이다. 왜 자연은 인간에게 너그럽고 관대하지 않느냐, 하는 사실에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하기야 자연재해가 인간에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공룡 멸종을 불러왔다는 지구와 소행성 충돌은 측량하기 어려운 우주의 티끌에 거주하는 지구 생명체의 유한성을 몸서리치게 경각시킨다.

그러하되 천지불인은 감당한다 해도 ‘성인불인’은 전혀 뜻밖이다. 만백성을 어버이처럼 긍휼히 여기고 인자하게 보듬어야 할 성인이 ‘인하지’ 않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인가?! 특별한 애착 없이 무심하고 초연하게 백성들을 대하는 위대한 정치 지도자를 어찌 성인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그것은 ‘인’에 대한 노자의 반감을 표출하고 있는성싶다. ‘인’을 숭상한 공자의 유가에 대한 직접적인 반발이 아닌가 한다. 그것을 입증하는 구절이 ‘도덕경’ 제18장에 나오는 ‘대도폐유인의’이리라. ‘커다란 도가 사라져버리니 인과 의가 나오게 된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노자가 생각한 도의 본질은 ‘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이었다.

‘사람은 땅을 따르고, 땅은 하늘을 따르며, 하늘은 도를 따르고, 도는 자연을 따른다.’ 노장(老莊)의 도가에서 내세운 극상의 도는 ‘자연’에 있다. 고로 자연의 본성이 인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을 따르는 성인 역시 인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름은 자명한 이치다. 그러하되 인간적인 것을 희구하는 21세기 현대인은 뭔가 아쉽다. 자연도 성인도 ‘인하면’ 좋지 않겠는가, 생각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나만의 바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다. ‘자연보호’를 외치는 일부 지각 있는 분들의 거룩한 외침이 허망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나는 천지불인은 허하되, 성인불인은 21세기에 맞춰서 수정했으면 한다. 현대의 위대한 정치 지도자들은 유구한 자연을 따르되, 어질고 자상하며 인자했으면 한다. 세상에 차고 넘치는 숱한 가난뱅이들과 배우지 못한 사람들과 아무런 기댈 언덕 없는 사람들에게 그 끝을 모를 정도로 ‘인했으면’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인간과 자연을 구별하는 가장 근본적인 차이이자 원리가 아니겠는가, 생각하는 것이다.

근자에 보도되는 한국사회의 우심(尤甚)한 경제적 불평등에 관한 기사를 보면서 춘추전국시대의 노자를 새삼 생각한다. 인위가 아닌 무위자연에 의지했던 고대의 사상가를 떠올리면서 인간 불평등의 오랜 역사를 돌이켜보는 것이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하지 못한다!”는 옛말을 훌훌 털어버리고 인간다운 공동체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백일몽을 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