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시의회 역대 의장들이 본 ‘28년 의회역사’
진병수 2대 후반기 의장 인터뷰

진병수 전 포항시의회 의장이 11일 오전 학도의용군 전승 기념관 일대에서 기념관 건립 추진의 동기가 된 '시'를 가리키고 있다.
진병수 전 포항시의회 의장이 11일 오전 학도의용군 전승 기념관 일대에서 기념관 건립 추진의 동기가 된 '시'를 가리키고 있다.

진병수 전 포항시의회 의장은 11일 “포항시가 100년 동안 먹을 수 있는 먹거리 준비에 올인 해야 한다” 밝혔다.

진 전 의장은 이날 ‘포항시의회 역대 의장들이 본 28년 의회역사’ 관련 인터뷰에서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해양문화관광도시 조성에 민관이 하나 되어 적극 추진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진 전 의장은 또 “관광산업은 21세기의 굴뚝 없는 산업”이라며 “돈과 사람이 몰리는 곳엔 인구도 증가할 것”이라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의정활동 한 가지만 소개해 달라.

►학도의용군 전승 기념관이다. 포항 용흥동 탑산을 등산하던 중 전몰학도충혼탑의 뒷면에 쓰인 시(詩)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 때 받은 감동이 너무 커 ‘학도의용군 전승 기념관’ 건립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수많은 학도의용병들이 포항전투에서 숨졌다. 아직까지 국내 학도의용군 전승 기념관이 없었다. 군번 없이 참가한 학도의용군 유품과 기록물들이 점점 소실되고 있었다. 생존자들의 육성음성 자료도 보관할 필요가 있었다.

- 당시 읽었던 시 내용을 소개해 달라.

► 아직도 외우고 있다. “동해 물결 굽이쳐 반만년 푸르니, 여기 파도처럼 청청한 호국의 넋들이 출렁댄다. 마흔여덟 분을 위시한 1천394위 그 이름은 학도의용군이니 삼천리금수강산 기슭마다 보듬어 이 겨레를 지키고 있다.

1950년 겨레의 반역도들이 이 땅을 피로 물들여 날뛸 때 책을 놓고 총을 잡아 그들과 맞서 싸웠다. 의로운 기백이 그대로 육탄일 뿐 철모도 없었고 군번도 모른다. 그 해 8월 11일 포항 전투에서 마지막 한 사람까지 목숨으로 지켰으니 나라 사랑의 외침은 마디마디 태백의 묏(산) 줄기를 울렸고, 그 뜨거운 피는 방울방울 아침 햇살에 이글거려 이 나라의 앞날을 비추었다. 사랑스러운 열일곱 살 내 겨레의 아들들이여, 그대들은 영광스러운 배달의 꽃이요 참다운 화랑이니 동해물결과 함께 길이길이 이 땅에 푸르리라.”

시는 힘이 넘쳤고, 기백이 있었다. 작자는 미상이었다.

-학도의용군의 활약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조국의 운명이 위기에 처했다. 나이어린 학도들은 붓을 총으로 바꾸어 쥐고 교복을 입은 체 학도 의용군으로 구국전선에 자진 입대했다. 북한군 제12사단이 1950년 8월 10일 포항 북쪽의 흥해를 점령했다. 이로 인해 국군 제3사단의 퇴로가 차단되고 포항이 함락될 위기에 놓였다.

당시 포항시내에는 해군 경비부 요원 300여명 가량, 공군 포항기지부대 1개 중대, 경찰과 청년방위대 3천 명가량이 있었고, 제3사단 후방지휘소가 위치한 포항여자중학교에 학도의용군 71명이 있었다.

학도병들은 스스로 2개 소대를 편성, 8월 11일 오전 4시부터 11시간 동안 북한군의 침공을 저지했다. 학도병들이 사투를 벌이는 동안에 제3사단 요원들은 이미 철수를 완료한 상태였다. 이 전투에서 71명의 학도병 중 47명이 전사하고 4명이 실종됐으며, 13명이 포로가 됐다. 학도병들의 분전으로 북한군의 포항시내 진출이 지연됨으로써 제3사단 사령부와 기타 지원부대 및 경찰, 행정기관이 무사하게 안전지대로 철수할 수 있었다.

그 뒤 육군본부는 ‘민기식 부대’를 영천에서 포항 방면으로 이동시켜 포항을 탈환했다. 포항전투는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한 최후의 방어선이었고, 인천상륙작전에 따른 북진의 시발점이 됐다.

포항시 용흥동 수도산에 건립된 학도의용군 전승 기념관.
포항시 용흥동 수도산에 건립된 학도의용군 전승 기념관.

-학도의용군 전승 기념관 건립의 추진에 대해서도 설명해 달라.

►당시 박기환 포항시장이 포항시의회 시정질문을 통해 요구한 ‘학도의용군 전승 기념관 건립’을 수용했다. 경북남부보훈지청이 적극 나서 힘을 보탰다.

16억5천여만 원을 들여 북구 용흥동 근린공원 4천여㎡ 부지에 연건평 900㎡ 2층짜리 전승기념관을 건립해 2002년 개관했다. 당시 학도의용군이 사용한 무기와 유품 100여점이 있는 전시실, 세미나실, 수장고 등도 갖췄다. 학도의용군 전승 기념관 일대도 정비했다.

포항시는 지난해 3월 지은 지 15년이 넘은 기념관의 낡은 시설물을 정비․보강했다. 잘못된 일부 자료도 수정했다. 생존자 증언과 고증,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료를 바탕으로 기존 자료 오류도 바로잡았다. 생존자 증언과 육성 증언대도 설치했다. 학도의용군 전승 기념관에는 학생들과 군인들의 견학이 이어지고 있다.

철모도 군번도 없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산화한 학도의용병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어 감사하다. 이들이 있었기에 나라도 있었고, 오늘의 번영도 누릴 수 있지 않는가? 후세인들은 이들의 애국심을 영원히 기억했으면 좋겠다.

-가장 아쉬웠던 한 가지도 들려 달라.

►경북도청의 동남권 유치 실패이다. 경북도청유치위원회 초대 회장은 고 강신우 삼일그룹 회장이었다. 포항상의회장도 맡으셨다. 그 분의 뒤를 이어 그 뜻을 이어갔다.

포항시의회 의장 퇴임 이후 포항지역발전협의회 회장을 맡았다. 경북도청유치위원회 위원장을 겸했다. 포항, 경주, 영천 등 동남권이 합세해 경북도청을 유치키로 의견을 모았다. 북부지역의 반대를 고려해 영천지역에 도청을 유치키로 했다. 울릉과 영덕도 동의했다. 영천은 교통요충지로 지리적으로도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던 중 임기가 끝나 버렸다. 포항시장도 바뀌었다. 포항시에 민간도청유치위원회가 결성됐다. 민간도청유치위원회는 포항 기계면으로 도청을 유치하려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당시 경북도는 예천과 안동의 도청유치 합작품에 높은 점수를 줬다.

-포항시 발전과 시민들에게 바람이 있다면?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해양문화관광도시 조성에 민관이 하나 되어 올인 했으면 좋겠다. 한반도 지도 호랑이 꼬리부분의 호미곶과 해수욕장, 항만 등을 활용한 산업과 국내외 해양스포츠 경기 유치는 국내외 관광객들을 포항으로 불러들일 수 있다.

국제회의를 열수 있는 호텔과 컨벤션센터 건립도 필요하다. 100년의 미래를 내다보고 100년 동안 먹을 수 있는 먹거리를 준비해야 한다. 지역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방안 마련에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돈과 사람이 몰리는 곳엔 인구도 증가한다.

바다와 운하 따라 설치한 스틸 아트 작품도 기발하다. 문화예술인들의 문화의 거리인 ‘꿈틀로’ 활성화 등은 관광객 유치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먹거리와 볼거리, 즐길거리가 풍성해야 한다. 포항물회, 포항과메기, 포항대게 등 풍성한 해산물을 통한 관광객 유치에도 더 적극성을 띠야 한다. 넓은 주차장 확보와 셔틀버스 운행, 바가지 상혼과 호객행위 근절 등은 포항관광 이미지를 크게 향상시킬 것이다.

-퇴임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최근 근황은?

►포항지역발전협의회 회장과 국제로타리클럽 3630지구(경북 로터리클럽) 총재, 김정재 국회의원 후보 선거대책위원장을 지냈으며, ‘법무사 진병수’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한편 생존해 있는 포항시의회 역대 의장은 다음과 같다. 양용주(2대 전반기), 진병수(2대 후반기), 박태식(3대 전반기), 임선순(3대 후반기), 공원식(4대 전․후반기), 박문하(5대 전반기), 최영만(5대 후반기), 이상구(6대 전반기), 이칠구(6대 후반기), 이칠구(7대 전반기), 문명호(7대 후반기), 서재원(8대 전반기 현 의장).

/김규동기자 kdkim@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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