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색채가 이 웃음보다 고울까
그 어떤 색채가 이 웃음보다 고울까
  • 홍성식기자
  • 등록일 2019.03.07 19:22
  • 게재일 2019.03.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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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펫과 정희성 시인
캄보디아의 국경마을 포이펫 아이들은 그들이 처한 곤궁한 형편과는 무관하게 너무나 잘 웃는다.

‘국경(國境)’이란 단어를 발음하면 이상스레 어둡고 탁한 느낌이 몰려온다.

이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국경이라고 하면 정치·이념적 적으로 규정된 북한을 먼저 떠올리는 탓이 아닐까?

누구도 쉽게 넘어갈 수 없는 ‘금지된 선(線)’인 남한과 북한의 국경.

하지만 유럽이나 인도차이나 반도를 여행하다 보면 생각이 바뀐다. 그곳에서 국경을 넘는다는 건 공무원에게 여권을 내밀고 조그만 도장 하나를 찍어 달라 청하는 ‘수월한 요식 행위’ 정도에 불과하다.

기자의 경험에 의하자면 오스트리아에서 슬로바키아, 헝가리에서 슬로베니아, 터키에서 이란, 라오스에서 베트남으로 국경을 넘을 때 모두 그랬다. 어려울 게 없었다.

국경을 지키는 경찰들과 웃으며 담배를 나눠 피울 정도로 긴장감이라곤 생기지 않았다. 이래서 “경험이 무섭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모양. 그렇지만 어렵지 않은 유럽과 동남아시아에서의 월경(越境)과는 별개로 어느 지역이건 국경 인근 마을은 무언가 스산하고 우울한 풍경을 지녔다.

무엇 때문일까? 인종과 문화, 종교와 생활양식이 다른 나라와 얼굴을 맞대고 사는 이들 특유의 표정을 지닌 국경 마을 사람들. 슬로바키아와 터키, 이란과 베트남, 헝가리와 라오스 국경 인근 주민들이 모두 비슷했다. 몸짓과 말투, 표정까지 닮아 있었다.

 

민지의 꽃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 살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을 비비고 일어나
말없이 손을 잡아끄는 것이었다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그것에 물을 주는 거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한다
그건 잡초야, 하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 쓸쓸한 풍경의 국경에서 만난 ‘희미한 미소’

이미 100여 년 전부터 캄보디아와 태국 사이에서 영토 분쟁을 겪어온 포이펫( Poipet)은 미려한 석조 건축물이 즐비한 세계적 관광지 앙코르 와트(Angkor Wat)를 찾는 사람들이 거쳐야 하는 조그만 국경 마을이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캄보디아의 여타 마을들처럼 포이펫 역시 먼지 날리는 도로 위를 오가는 걸인이 적지 않고, 상하수도와 전기 등 도시 인프라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편하고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것이라곤 중국과 태국에서 무시로 드나드는 도박꾼을 위한 고층 카지노 건물 정도가 전부인 황량한 풍경의 마을.

소녀를 만난 건 바로 그 포이펫에서였다. 사진작가인 선배와 함께 앙코르와트로 가는 택시나 버스를 알아보기 위해 주변 상인들에게 정보를 구하고 있던 때였다.

갑작스레 열대성 소나기인 스콜(Squall)이 쏟아졌다. 무시무시할 정도의 기세로 퍼붓는 엄청난 비.

짧은 순간에 사람들의 바짓단으로 흙탕물이 튀었다. 배낭을 둘러멘 젊은 여행자들은 빠른 걸음으로 스콜을 피해 처마 아래 몸을 숨겼다. 그런데 이건 뭐지. 열두어 살쯤이나 됐을까? 조그만 소녀 하나가 빗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다니며 노래를 부르다가 우리 일행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흠뻑 젖은 채로. 그리고는 웃었다. 선배가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소리를 내거나 잇몸이 보이는 커다란 웃음이 아닌 희미한 미소. 갑작스레 흑백 사진처럼 보였던 주위 풍경이 컬러 사진인양 환해졌다.

소녀의 미소가 너무나 맑고 순정해 보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욕심 없는 웃음이었다.

그 순간, 10여 년 전 감탄하며 읽었던 정희성(74) 시의 주인공 ‘민지’가 떠올랐다. 민지의 웃음도 포이펫 소녀의 미소 같았을 것이 분명하다. 환하고 순박해서 꾸밈이 느껴지지 않는 아이의 웃음.


▲ 모든 소녀들이 꿈을 잃지 말기를…

비단 정희성의 노래가 아니더라도 많은 이들이 이미 알고 있다. 아이들은 세상의 때가 묻은 어른들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사물을 살피고 해석할 줄 안다. 그네들은 어른에겐 없는 ‘순정한 눈’이라는 강위력한 무기를 지니고 있다.

시는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조근조근 들려준다.

멀리 산골로 귀농한 제자를 찾아간 노시인. 그는 거기서 꼬마 숙녀 민지를 만난다. 꽃과 풀도 사람들처럼 아침밥을 먹어야 한다고 믿는 맑은 눈망울을 가진 조그만 아이.

잡초에게도 인사를 건네며, 생명을 가진 것들 중 하찮은 것은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알려주는 민지는 어떻게 보면 어른들의 스승이 아닐까.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는 ‘풋풋함’을 가졌으며, 순수한 ‘말 한마디’로 우리의 편견과 무지를 꾸짖는 당돌함. 그 당돌함 안에 오롯이 담긴 소녀 특유의 선량함.

정희성은 어려운 단어 하나 없는 작품 ‘민지의 꽃’을 통해 어른들이 잊고 사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진정한 순수함에 닿으려면 어떤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인지를 독자들의 귀에 대고 가만히 속삭이고 있다.

이제 시의 무대인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에서 다시 캄보디아의 가난한 국경 마을 포이펫으로 돌아가 보자.

초라한 옷차림과 검게 탄 얼굴의 포이펫 소녀. 한빈함 속에서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음이 분명한 그 아이의 현재가 구구한 설명 없이도 느껴진다. 과거 또한 마냥 밝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소녀의 미래까지 흑백 사진 속 그림자처럼 어둡고 우울하기만 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고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부끄럽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어른으로서.

소녀건 소년이건 세상 모든 아이들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누가 함부로 이 문장을 부정할 수 있을까.

아래 졸시는 아이들의 웃음을 보며 작은 행복을 느낀 날 세상 밖으로 ‘사라진 소녀’가 세상 속 ‘희망’으로 부활하는 날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쓴 졸시다.

한국 산골 마을에 사는 다섯 살 민지도, 캄보디아 국경 마을 포이펫에 살고 있을 사진 속 소녀도 그 미래가 찬란한 무지개 빛깔로 빛나기를 진심으로 빈다.

그 강, 소녀를 찾았다


희망은 기어이 등을 돌렸다

만취한 목소리의 사랑노래

마주 걸면 따숩던 어깨의 기억을 뺏긴 우리

돌아서 안타까워했을 따름이다



겨우 꽃들만이 제 빛깔 지킬 뿐인

추방자의 도시

질척질척 비가 내리고

한 치 앞도 분간 못할 안개다

어둠의 혓바닥이 삼킨 작은 아이들

우울하게 잦아드는 목쉰 속삭임



이제는 피라미 한 마리까지 떠나버린

검은 기침 쿨럭이는 강

상한 가슴으로 그 앞에서면

기억은 천식처럼 발작하건만

팔이 아프게 돌을 던져도

둥근 파문은 말이 없다



십수 년 전 안개 속으로 사라진 소녀는

목 메인 세상 넋두리에도 대답이 없고

하지만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부활했다던 그 옛날 선지자인 듯

우리들 어설픈 믿음과 속삭임 속에

그 소녀, 가라앉은 잿빛 하늘 찢으며

절절한 몸부림으로 돌아올지도.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제공/구창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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