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희 수필가
김순희
수필가

영양군은 선비들이 숨어살던 곳이다. 태백산맥에 둘러싸여 해발 고도가 경상북도에서 가장 높은 분지이며 일월산을 품고 있어 산이 높고 물이 맑다. 감천, 석보 등 고인돌과 고분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은 분명하다. 신라에 흡수된 뒤에는 읍호를 고은(古隱)이라 하였다가 말기에 영양(英陽)이라 하였다.

일월산 자락 한쪽 끝에 자리한 두들마을을 찾아가는 길은 굽은 길이다. 들고나기 힘든 곳이라 육지의 섬이라고도 부른다. 굽은 길을 조금 펴기 위해 뚫은 청기터널을 지나자 골뱅이골이라는 이정표가 보였다. 골뱅이처럼 구불거려서일까 골뱅이가 많이 나서일까 마음으로 짚다보니 두둘길에 접어들었다.

두들이란 언덕 위라는 뜻으로 대부분이 산으로 이루어진 영양의 마을 이름답다. 가로등마다 붉은 고추와 귀여운 벌이 심벌로 매달려 여기가 그 유명한 ‘영양고추’의 고장이라고 외치고 있다.

겨울 매서운 바람 때문인지 동네에 인적이 드물었다. 우편집배원이 작은 차에 택배상자를 싣고 고택의 주인을 부른다. 두런거리는 소리를 따라 근처 비닐하우스로 오른다. 우리도 따라 가니 배달을 끝내고 내려오며 비닐하우스에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있으니 가보라 했다. 그 곳에는 대여섯 명의 어르신들이 고추 꼭지를 따고 있었다. 연세가 어떻게 되냐는 물음에 모두 낼모레 80이라며 웃는다. 이 마을에서 젊은 축이라며 아직 일을 해서 용돈 버는 것을 자랑하셨다. 혼자 나이 드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라고 했다.

林(숲)이란 글자 속에는 나무 두 그루가 손을 잡고 서 있다. 어깨도 서로 맞대고 있어서 바람이 불면 한 방향으로 몸을 뉘었다 일어서길 반복한다. 흔들릴 줄도 모르는 빌딩숲에서 넘어지기만 하던 나는 푸른 기운을 받으러 영양의 林으로 갔다.

장계향이 이시명과 함께 영양에 터를 잡으면서 제일 먼저 한 일도 마을 둘레에 도토리나무를 심은 일이었다. 영양은 깊은 골짜기라 논보다는 두들이 대부분이다. 도토리나무는 영험한 기운이 있어 두들에서 들을 내려다보며 풍년이면 열매를 적게 열고 흉년이 들면 많이 열린다고 한다. 아마도 곤궁한 이들의 생계를 걱정하여 그 부족한 것을 채워주려는 배려였을 것이다. 장계향은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부족한 해에는 마을 앞에 큰 솥을 걸어두고 도토리 죽을 쒀서 굶는 사람들을 살렸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영양이라는 숲의 중심에는 장계향이라는 큰 나무가 중심을 잡고 있다. 그는 83세까지 장수하며 73세에 ‘음식디미방’이라는 최초 한글 조리서를 완성했다. 그가 심은 나무는 3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서 그곳을 지나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다 기억하고 있다. 도토리가 익어서 떨어지는 가을이면 동네 노인들에게 도토리 수확을 맡겨 수매를 해 음식디미방 프로그램에 사용한다. 다른 곳의 음식 차림과 큰 차이점이 소부상과 정부인상의 전채 요리로 도토리죽이 먼저 나온다는 점이다. 장계향의 뜻과 향기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어 보기 좋았다.

소소음(蕭蕭吟)- 창 밖에서 소록소록 비내리는 소리(窓外雨蕭蕭), 소록소록 그 소리는 자연의 소리러라(蕭蕭聲自然,) 내 지금 자연의 소리 듣고 있으니(我聞自然聲), 내 마음도 또한 자연으로 가는구나(我心亦自然). 장계향이 13살에 썼다는 시처럼 영양을 찾아간 날에도 소록소록 비가 내렸다.

비를 머금은 도토리나무 아래에 섰다. 나무 아래에 드는 것이 쉴 휴(休)이다. 천상병 시인은 삶을 소풍이라 했다. 김밥과 킨 사이다 한 병만 들고 큰 나무 아래로 간 소풍날은 어찌나 즐거운지 날이 빨리 저물었다. 골 깊은 두들마을의 저녁도 빨리 찾아왔다.

아름다운 삶을 사는 방법은 이웃과 함께 가는 소풍이라는 것을 영양의 숲이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