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의 마지막 날, 며칠째 계속되던 흐린 날씨도 가셨다. 하루는 겨울인데도 꽤나 무덥더니 다시 한국의 초가을 날씨로 돌아왔다.

길가의 베트남 음식을 파는 곳에 우리가 들른 것은 밤, 아홉시 반은 되었다. 피곤은 한데, 내일 아침이면 일행들은 하롱베이로 떠나고 나는 이 나라로 돌아와야 했다. 벌써 일주일 넘게 체류하고 있어 적당히 지쳤지만 타향에서 만난 친구들을 이 좋은 밤에 그냥 외면할 수 없다.

플라스틱 탁자를 가운데 놓고 서로들 둘러앉았다. 나는 그중 작디작은 의자를 골라 납작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쌀국수 국물 같은 데다 쇠고기에 야채를 삶은 것은 아마도 깐(Canh). 전통 음식이었다. 낮에 찾던 하노이 보드카 대신 엘리게이터라는 술도 맛이 그럴듯했다. 고풍스러운 문묘의 전각들을 담장 너머로 바라보며 서로들 독주를 담은 작은 술잔을 기울였다. 깐은 내 입맛에 딱 맞았다. 베트남 향초를 무서워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십 년 사이에 내 혀는 이제 넉살이 붙었다.

ㅡ여기 앉으니 정말 하노이에 온 것 같군.

ㅡ그러게요.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입을 맞추었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후둑후둑 빗방울이 듣는가 했는데 어느새 퍼붓는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우리쪽 탁자에는 서둘러 사각 파라솔을 쳐 준다. 잠깐 사이에 베트남 손님들은 어디론가 다들 사라져 버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건물 안에도 탁자들이 있었다.

내 등으로는 파라솔에서 떨어져 내린 빗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앏은 남방 속으로 물이 스며들었다.

ㅡ하노이 술도 나쁘쟎네요.

ㅡ맞아요.

먼저 집에 벌써 일본 소주에 맥주까지 마셔 취기가 꽤나 오른 상태. 그런데 이상하다. 마실수록 술이 깬다.

ㅡ다들 어디로 사라졌지?

ㅡ집에들 가버렸나 봐요.

ㅡ빠르네.

빠르다. 비가 마구 퍼붓더니 어느새 딱 그치고 보름달까지 떴다. 그러고 보니 정월 대보름이 바싹 다가온 때다.

달이 크기도 하다. 베트남은 깊은 겨울밤도 선선한 정도다. 이렇게 좁다랗게 모여 앉으니 더 친한 사람들 같은 기분도 난다.

평소에 김소월 시인의 ‘산’을 즐겨 부르는 선배가 취중에도 목청을 가다듬고 노래를 불렀다.

소월은 어쩌자고 이렇게 처연한 시를 썼단 말인가. 목숨은 왜 스스로 끊었단 말이냐.

내일이면 서울로 돌아가야 하건만 차마 돌아가고 싶지 않다.

인터넷으로 들려오는 ‘고국’의 소식들은 소란스럽다 못해 어지럽기 그지없다. 재작년인가부터는 어느 곳 하나 기댈 곳, 마음 둘 곳이 없다.

정든 생각도, 사람도 무서울 지경이면 삶은 막바지에 다다른 것. 타향을 떠도는 것도 나쁘지 않건만.

이제 문 닫아야 한다고, 장사하는 사람들이 탁자며 의자를 걷어낸다. 빈 그릇을 잔뜩 쌓아놓고 설겆이를 하고 남정네는 대비로 바닥을 싹싹 비질을 해댄다.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돌아가야 한다. 어지럽고 무섭더라도 고국이니까. 거기 나를 끌고 가는 도구들이 있으니까. 나는 결국 한반도 사람이니까.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