⑨ 세조, 미나리 때문에 크게 노하다

미나리와 삼겹살은 궁합이 맞는다. 미나리의 향기는 고기의 느끼함을 잡아준다.

오래 전, 미나리는 ‘각별’했다.

2019년 봄, 청도 한재의 미나리는 어수선하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11년(1465년) 5월10일의 기사다. 제목은 ‘침장고(沈藏庫)와 사옹방(司饔房)의 관리를 추국케 하다’다. 미나리 때문에 왕의 부마와 친족, 고위 관리 여러 명이 벌을 받는다. 큰 사단이다. 550년 전, 각별했던 미나리 이야기다.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침장고의 관리가 바친 채소는 지극히 거칠고 나쁜데다 또 몸소 친히 바치지 않았으며, 사옹방의 관리와 환관들도 또한 검거하지 아니하여 모두 마땅하지 못하니, 추국하여 아뢰라’ 했다. 세자궁 앞에 미나리[芹]가 아름다워서 바치게 했는데, (나중엔) 억세고 나쁜 것이었다. (중략) ‘근래 침장고의 관리가 서리(胥吏)만 보내고 스스로 감독해 올리지 않아서 특히 사체(事體)를 잃었다’면서 (중략) 그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조짐이 있는 것이니, 그들을 국문해 아뢰어라.’(후략)”

사단의 실마리는 세자궁에 심었던 미나리. 이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처음엔 세자궁의 미나리가 좋았다. 중간에 관리가 잘못되었다. 침장고는 채소, 곡물 등을 보관·관리한다.

사옹방(사옹원)은 궁궐, 왕실의 식재료, 음식을 관리한다. 고위 관리가 미나리를 직접 챙기지 않고 하급 서리만 보냈다. ‘관리 소홀’이다. 결론이 엉뚱하다. 미나리로 시작해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마음”이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튄다. 억지다.

 

드라마 ‘장희빈’으로 널리 알려진 숙종 조 인현왕후의 폐위를 두고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이라”는 노래가 유행했다. 미나리는 ‘불쌍하게 쫓겨난’ 인현왕후를 가리키고 장다리는 성 씨가 장 씨인 장희빈을 가리킨다.

처벌도 대단했다. 사옹제조 청성위 심안의, 영가군 권경, 침장고 제조 이서 등이 승정원의 ‘책문’을 받았다. 승정원은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 제조는, 궁궐의 기술직 부서를 관리하는 고문으로 고위직 문관들이 맡았다. 청성위는 세종대왕의 차녀 정안옹주의 남편이다. 세조와는 처남, 매부 사이. 영가군 권경도 명문세가 출신의 고위직이었다. 이서는 효령대군의 사위다. 세조와는 사촌지간 처남, 매부 관계다. 이 세 사람이 모두 ‘책문’을 받았다. 명예에 흠이 가는 일이다.

그 아래 실무자들은 엄하게 당한다. 침장고 별좌(別坐) 오형, 권선은 장 70대, 김종직은 장 100대, 침장고 별좌 김회보, 사옹별좌 이중련, 조금 등은 파직, 환관 김눌은 군대에 끌려갔다. ‘별좌(別坐)’는 정, 종5품직이다. 낮은 벼슬이 아니다. 부서 실무책임자 급. 이들이 장을 맞거나 파직당했다. 환관(내시)은 바로 군대로 끌려갔다. 미나리 관리 소홀은 이토록 대단한 죄였다.

 

미나리와 삼겹살은 궁합이 맞는다. 미나리의 향기는 고기의 느끼함을 잡아준다.
미나리와 삼겹살은 궁합이 맞는다. 미나리의 향기는 고기의 느끼함을 잡아준다.

◇ ‘미나리 궁전’ 근궁(芹宮)과 헌근록(獻芹錄)

‘근훤(芹暄)’은 ‘미나리’(芹, 근)와 ‘따뜻한 햇볕’(暄, 훤)이다. 중국 고대 이야기다. “가난한 농부가 미나리 맛이 일품이라 생각해 토호에게 먹어보라고 권한 일과 춘추시대 송나라의 한 농부가 이른 봄 햇볕을 쬐면서 ‘이 좋은 햇빛을 임금께 드렸으면 한다’는 말에서 시작됐다(列子 楊朱, 열자 양주). 미나리는, 보잘 것 없는 물건을 윗사람에게 정성으로 올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헌근(獻芹)’ 혹은 ‘헌근지성(獻芹至誠)’이다. ‘열자’는 전한(前漢)시대에 편집됐다. 기원전부터 중국엔 ‘헌근’ 이야기가 있었다.

우리도 미나리를 오래 전부터 먹었다. 통일신라시대 최치원의 ‘계원필경’에도 등장하고 고려시대 ‘헌근지성’의 고사는 자주 등장한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국왕에 대한 충성’을 설명할 때 ‘헌근’의 고사가 사용된다. 세조 시절 ‘미나리 사단’ 이유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세조는 어렵게(?) 왕이 됐다. ‘아버지(세종)-형(문종)-조카(단종)-세조’로 이어진 왕통이다. 조카를 귀양 보내고 왕권을 차지했다. 세자를 보호하고 싶었을 것이다. 세자궁 연못에서 자라고 있던 미나리다. 채소에 불과한 미나리지만 의미가 깊다. 미나리 관리 소홀이 곧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마음”이라고 강변한 것은 바로 ‘미나리=충성’이기 때문.

미나리의 역사는 길고도 깊다. 대학 혹은 태학(太學)은 중국 최고의 교육기관. 대학, 태학의 학생들은 관리가 된다. 이들의 충성심으로 나라는 유지된다. 주(周)나라 때는 대학 담장을 따라 물길을 만들었다.

반수(泮水)다. 대학은 ‘반궁(泮宮)’이라 불렀다. 반수엔 미나리를 심었다. 이런 대학 건물은 근궁(芹宮), 즉, ‘미나리를 심은 궁전’이다. 기원 전 479년에 편찬된 ‘시경’에는 “즐거워라. 반궁의 물가에서 미나리를 캐노라”는 문장이 있다. 우리도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시절’을 ‘반궁에서 미나리 캐던 시절’이라고 표현했다.

‘헌근록(獻芹錄)’은 임금에게 올리는 글. 별 볼 것 없이 글이지만 올바른 국가 경영을 위해 임금에게 올린다는 의미다. 미암 유희춘은 ‘미암집’ 1576년(선조 9년) 1월의 내용에서 “다시 살펴보니, 임금께서 내린 것은 내가 경오년(1570년, 선조 3년)에 올렸던 ‘헌근록(獻芹錄)’이요, ‘유합’이 아니었다”고 했다.

‘헌근록’과 ‘유합’은 모두 미암이 저술한 책 이름. ‘헌근록’은 국왕께 올린 “사소하고 미미한 글, 읽을 필요가 없는 중요치 않은 글”이라는 겸양의 의미를 담았다. 내용은 국왕 선조가 정사를 펼칠 때 필요한 것을 담은 것이었다. 선조의 경연(經筵) 스승이기도 했던 미암은 국가 경영 참고서인 ‘헌근록’을 선조에게 바쳤다.

 

봄날의 푸른빛이 가득한 미나리 농장.
봄날의 푸른빛이 가득한 미나리 농장.

 

◇ 국가와 국가 사이 ‘미나리를 바치는 정성’

‘헌근’은 나라와 나라 사이 문서에서도 나타난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10년(1479년) 6월 22일의 기록이다. 제목은 ‘유구 국왕(琉球 國王) 상덕(尙德)이 사신을 보내 서계를 올리다’다. 유구는 오늘날의 오키나와. 오키나와 국왕이 조선 조정에 편지와 함께 물건을 올렸다.

“(전략) 삼가 드리는 토산물은 별폭(別幅)에 갖춥니다. (중략) 호초(胡椒) 1백근, 납자 50근, 울금(鬱金) 1백근, 백단향(白檀香) 50근, 향(香) 50근을 진정(進呈)하니, 삼가 바라건대 헌근(獻芹)의 정성으로 받아주시고 수납(收納)하여 주시면 다행스럽겠습니다.”

이때 조선사람 9명이 표류하다가, 일부가 오키나와의 도움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오키나와 측에서는 후추 등 선물을 마련해 조선 조정을 방문, 조선 출신 표류인의 동정을 전하고 대가로 대장경 등을 요구한다. 편지 중에 ‘헌근지성’이 나타난다. ‘일본(규슈, 오키나와)-조선-중국 명나라’를 잇는 ‘조공’ 혹은 ‘조공무역’은 상업적인 거래였다. 국가 간의 무역이었지만 ‘헌근’ ‘헌근지성’이라는 글귀는 사용했다.

세종 29년(1447년) 6월 20일의 기록에도 ‘헌근지성’이 나타난다. 한해 전인 1446년에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일본 일기주(一岐州, 이키시마)의 병부소보 원영(兵部少輔 源永)이 편지와 토산물을 전한다. 내용 중에, 원영 역시 한해 전에 상사(喪事)를 당해서 예의를 올리지 못했고, 지금에야 ‘경박한 물건을 올린다(헌근지성)’고 말한다.

우리도 중국에 사신을 파견할 때 늘 ‘헌근’ ‘헌근지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상거래지만 편지에는 ‘미미하고 볼품없는 물건을 바친다’는 겸양의 단어를 넣었다.
 

청도군 미나리 농장. 초봄 미나리를 다듬고 있다.
청도군 미나리 농장. 초봄 미나리를 다듬고 있다.

 

◇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이라”

미나리는 궁중, 민간을 가리지 않고 먹었다. 종묘 제사에도 생 미나리[水芹生菜, 수근생채]를 사용했다. 생 미나리와 더불어 ‘근저(芹菹)’도 올렸다. 근저는 미나리 김치인데 미나리 초절임인지 미나리를 삭힌 김치인지는 정확치 않다. 드라마 ‘장희빈’으로 널리 알려진 숙종 조 인현왕후의 폐위를 두고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이라”는 노래가 유행했다. 미나리는 ‘불쌍하게 쫓겨난’ 인현왕후를 가리키고 장다리는 성 씨가 장 씨인 장희빈을 가리킨다. 성종 19년(1488년) 중국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을 찾았던 동월(董越)은 ‘조선부’에서 “조선인은 왕도(한양)와 개성 민가 작은 연못에 미나리를 심었다”고 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널리 미나리를 심고 먹었다.

조선 중·후기에는 환금작물로 길렀다. 다산 정약용은 ‘다산시문집_제5권_다산화사(茶山花史)’에서 “금년에야 처음으로 미나리 심는 법을 배워/성 안에 가 채소 사는 돈이 들지 않는다네”라고 했다. ‘다산화사’는 다산이 전남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지은 시. 이때 ‘성 안’은 한양이 아니라 강진 언저리다. 다산이 유배생활을 하던 19세기 초에는 시골에서도 미나리를 환금작물로 길렀다.

사족. 최근 한재 미나리로 유명한 경북 청도 각남면에 다녀왔다. 분위기는 죄다 “싸고, 맛있고, 양이 많은 삼겹살을 미나리와 함께”였다. 손님들이 돌아가고 난 후의 식탁에 삼겹살은 없어졌지만 군데군데 미나리는 남았다. 종묘의 제사에 사용하고, 성균관, 근궁에서 충성을 뽐내던 미나리다. 미나리 김치, 미나리강회, 초봄의 향을 전하던 미나리 솥밥도 보기 힘들다. ‘삼겹살과 미나리 구이 통일’이다. 상상력의 한계다. 우리는 맛, 양, 싼값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은유, 직유는 사라지고 ‘돌직구’만 남았다. 미나리는 풍년인데 미나리 음식 문화는 없다. 씁쓸하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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