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정문화부장
윤희정 문화부장

“고모, 나 목요일에 개학이야!” 며칠 전 고등학생이 된 조카로부터 카톡 메시지를 받았다. 예쁜 곰돌이가 하트를 발산하며 360도 회전하며 춤추는 이모티콘과 함께였다. 봄이 제법 몸으로 체감되는 때다. 아직‘겨울바람의 꼬리’가 남아 있지만 오는 봄을 무엇으로도 막을 수는 없다. 봄 안에서 그 어떤 사회 경제적 어려움과 변화에도 불구하고 끄떡없이 우리의 일상적 삶 안에서 구동되는 자연의 원리, 희망의 싹이 튼다.

봄은 겨우내 숨을 죽였던 생명 활동이 다시 시작되는 때다. 작은 야생초들이 땅 속에서 의연히 솟아오르고, 채소의 씨앗들은 뿌려지는 손길을 따라 헛기침 인기척을 하면서 올라오고, 나무들의 푸른 싹들도 줄기의 곳곳에서 보물찾기의 주인공처럼 뜸을 들이면서도 어느새 초록의 형체를 드러낸다. 누가 명하지 않아도, 누가 지켜보지 않아도 올라오는 싹들, 우리의 희망도 그런 것이 아닐까? 많은 시인들이 봄을 밝음·탄생·생명·이상·기쁨 등의 긍정적이며 희망적 이미지로 표현한다. 작품 가운데서도 봄은 밝고 경쾌하거나 혹은 이상향을 대변하는 긍정과 희망의 상징으로 표현된 것이 일반적이다.

희망은 삶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다. 미래, 당장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는 삶은 맹목적이고 허무할 수밖에 없다. 최근 언론에 회자되는‘삼포 세대’란 여러 가지 이유로 희망을 갖기 어려운 젊은이의 현실을 함축한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직장인, 외로움에 힘들어하는 노년 세대 모두 꿈과 희망을 갖기 어려운 세상이다. 독일의 사상가인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7)는 “인간은 끊임없이 희망을 품는 존재다”라고 했다. 희망이 인간 고유의 원초적 생명력이라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블로흐의 ‘희망철학’의 출발은 근본적인 질문 3가지로부터 출발한다. 첫째,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둘째,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셋째,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이다. 우리는 자유주의 시대를 살아왔고, 현재 신자유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현 사회에서 인간은 자본주의 쳇바퀴의 노예가 되기 위해 혼란, 불안 그리고 공포를 느끼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산업예비군으로 무장돼 있다. 이 시대의 노동자는 자본주의 하의 노동이라는 울타리에서 허우적거리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우리도 유토피아를 꿈꾸고,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는 자는 개와 같은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블로흐는 희망을 찾는 작업은 개와 같은 삶을 용서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개는 자기 자신의 현존재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비참하게 인식되고, 파악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의 귀에 익숙해진 청년실업, 저성장, 저출산과 고령화, 양극화, 사회안전망, 젠더 갈등, 세대 갈등, 이념 갈등, 정치 개혁 등 중대 현안들은 밝은 미래로 나아갈 앞길을 가로막은 장벽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3월이다. ‘지역과 나라, 세계의’다채로운 동산에서 피어나고 있는 ‘희망의 싹’들이 여기저기 뿌려져 있다. 그 싹의 생명력이 우리 각자의 시선과 마음속에서 한순간이라도 희망으로 정착되기를 희망한다. ‘내일’이 기다려지는 뚜렷한 이유 한 가지만 있어도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숨쉬는 한 희망은 있다(dum spiro, spero)’라고 하지 않았던가.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란 유명한 싯귀가 있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새싹이 돋아나는 것을 보면, 얼어붙었던 흙속에서 새움이 트는 것을 보면, 인간세상에 절망이란 없다는 것을 깨닿게 된다. 처칠경의 유명한 연설이 있다. “포기하지 마라! 절대 포기하지 마라!”현실이 어렵다 해도 노인층이 겪어온 세월보다 더 어려운 역경이 있었겠는가? 못 먹어서 부황이 들고, 봄이 오면 얼굴에 허옇게 봄버섯 피는 소년시대를 거쳐온 어르신세대를 보면서 용기를 얻을 일이다. 세상에 극복 못할 역경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