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홍한국은행 포항본부 기획조사팀장
김진홍
한국은행 포항본부 기획조사팀장

포항 경제계는 그 어느 지역보다도 남북관계개선과 북미정상회담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특히 이를 계기로 한반도 동해안철도와 북한을 경유하는 한·러 간 가스파이프라인이 연결될 경우 미국의 수입규제나 조선 등 철강수요 부진을 대체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작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핵문제와 유엔 등의 제재조치가 모두 해결되어 북한이 중국처럼 개혁개방에 나서더라도 우리나라가 대북 투자나 대북경협을 독점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남북 당사자에게만 해당되는 프로젝트가 아닌 한 북한도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투자조건이나 협력방식을 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가시화되고 있는 남북한 철도현대화사업과 한·러 가스파이프라인 건설만 하더라도 사업예산과 북한 측의 사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면 저가의 중국산 철강자재를 배재하고 한국산 자재만을 고집하거나 미국과 러시아 업체가 동참하려 할 때 지속적인 한반도 평화를 고려한다면 무조건 한국의 배타적인 독점권을 고집하기 어려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내외 정세변화에 일일이 실망할 필요도 과도한 기대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역 철강자재가 가격, 품질, 기술면에서 절대 우위의 경쟁력을 갖추는데 주력해야만 한다. 지금까지 포스코의 기본 강재를 2, 3단계 정도까지 절삭, 가공, 조립 등 중간재 형태로 생산, 판매하며 포항 지역경제를 성장시켰던 프로세스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프로세스는 중국을 비롯한 인도, 베트남 등 후발국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포항지역경제가 그동안 부진에 빠지게 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철강 산업을 사양 산업이라고 이야기하는 근거는 바로 이와 같은 과거의 성장 프로세스만을 연상하기 때문이다. 물론 앞으로도 철강은 ‘산업의 쌀’의 위치를 고수하겠지만 이 ‘쌀’을 씻어 단순하게 밥을 짓기만 하면 되던 시대는 분명히 끝났다.

그렇다면 지역철강업계는 어떠한 프로세스로 부활할 수 있을까. 철강이라는 산업의 ‘쌀’을 ‘밥’이 아닌 그 이상으로 활용하도록 해주거나 직접 새로운 용도의 최종제품으로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이다. 쌀을 곱게 갈아 케이크를 만들 수 있게 해준다거나 녹차가루와 견과류 등을 혼합한 ‘철이 포함된 복합재료’로 재탄생시켜 ‘떡’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제품화할 수 있도록 재료의 복합화, 용도의 다양화, 사용의 편리성 등을 높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준비는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와 같이 생산 공정을 풀가동하는 성장단계에서는 불가능하다. 쌀에 불순물이 들어있어도 물량이 부족할 때에는 그것으로 만족하기 쉽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처럼 자신과 무관한 외부여건으로 기업이 어려움을 겪으며 시간과 인력이 남을 때, 용돈벌이라도 하겠다는 은퇴한 숙련기술자가 남아돌 때 이 가용자원들을 활용하여 연구개발에 힘써 자사의 기술력 향상과 고부가가치 신제품개발, 품질경쟁력 강화 등 체질개선에 힘쓸 절호의 기회다.

이와 같은 체질개선과 연구개발로 품질과 기술경쟁력을 갖추는데 투입된 비용은 지역 철강제품의 가격에 그대로 반영하면 된다. 이러한 경우에는 최소한 가격 덤핑문제에서는 자유를 얻게 되어 수출경쟁력도 한 단계 높아질 것이다. 포항 경제와 지역 철강업계가 부활하려면 이 기회를 결코 놓쳐서는 아니 된다. 물론 남북관계 개선에 따른 특수나 영일만대교 건설 등과 같은 단발적인 프로젝트를 굳이 거부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메인 식사가 아닌 디저트로 여겨야만 한다. 앞으로도 세계적인 철강수요의 급증은 기대하기 어렵다. 이번 기회를 놓칠 경우 지역철강업계는 정치적인 개발 사업과 가격경쟁에만 목숨을 거는 사양 산업으로 시계를 되돌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