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룡서예가
강희룡 서예가

조선 초기 문신이자 서화의 삼절(三絶)로 추앙을 받던 강희안(417∼1464)은 꽃과 나무에 대한 재배법과 이용법을 설명한 책인 ‘청천양화소록(菁川養花小錄)’을 저술했다. 이 책의 내용은 예로부터 사람들이 완상(玩賞)해온 꽃과 나무 몇 십 종을 들어 그 재배법과 이용법을 설명했으며, 또한 꽃과 나무의 품격과 그 의미와 상징성을 논하고 있다.

원예나 골동품 수집 등 취미생활은 선비의 학문과 수양을 방해한다는 이른바 완물상지(玩物喪志)의 전통 때문에 원래 유교사회에서 선비들의 꽃가꾸기는 일종의 금기였다. 그러나 강희안은 양화소록 후기에서 “화훼를 재배하는 것은 사람의 심지를 굳건히 하고 덕성을 기르기 위해서다”라며 완물상지를 반박하고 있다. 몰두하지 않고 취미생활을 조절하면 하등 문제가 없고 오히려 학문에도 도움이 된다는 입장이다. 실제 그는 이른 봄꽃이 필 때 등불을 켜고 책상머리에 두면 벽에 비친 잎의 아름다운 그림자를 즐길 수 있고 책을 읽는 동안 졸음을 없앨 수 있다며 체험적 난초 감상법을 들려준다. 또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의 미물이라도 이치를 탐구해 근원으로 들어가면 지식이 미치지 않음이 없다”면서 꽃을 기르는 것을 학문 연구 및 경륜의 한 방편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양화소록에는 ‘무릇 꽃을 재배하는 것은 오직 마음과 뜻을 굳건히 닦고 어질고 너그러운 성질을 기르는 데 있다.’라면서, 소나무는 굳은 의지를, 국화는 세상을 피해 조용히 사는 은일(隱逸), 매화는 높은 품격, 난초는 품격과 운치를 본받아야 한다고 적고 있다. 양화소록을 보면 당시 한국인이 좋아했던 꽃들을 알 수 있는데 주로 매화, 석류화, 단계화(丹桂花), 백일홍, 동백같은 수목화요, 화초는 목단 국화, 연꽃, 창포정도에 불과했다. 당시 선비 층에서는 꽃과 나무에 그 상징적 의미에 따라 품계나 등수를 매겼다. 강희안은 매, 국, 연, 죽, 소나무는 1품, 모란은 2품, 월계, 영산홍, 석류, 벽오동은 3품으로 단풍은 4품, 장미는 5품, 목련은 7품에 들어 있다. 특히 매화는 화괴(花魁), 즉 꽃의 우두머리이며 선비의 꽃이다. 청아하면서 속기(俗氣)가 없고 평생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 선비의 삶이 가시밭길같이 춥고 배고파도 그 정신만은 저버리질 않는다. 때문에 추위가 한바탕 뼛속 깊이 사무치지 않고서는 매화의 은은한 향기를 맡을 수 없다.

고려중기 문인인 진화(1179~?)는 매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봄의 신이 뭇 꽃을 물들일 때/ 맨 먼저 매화에게 옅은 화장을 시켰지/ 옥결같은 뺨엔 옅은 봄을 머금고/ 흰 치마는 달빛에 서늘해라.’강희안의 할아버지인 강회백이 심은 정당매(政堂梅)의 일화는 유명하다. ‘우리 선조 통정공이 어려서 지리산 단속사에서 책을 읽었다. 그 때 절 마당 앞에 매화 한 그루를 심었다. 공이 과거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정당문학의 벼슬에 올라 지금까지도 그 매화를 정당매라고 부른다’라고 적고 있다. 600여 년이 흐른 오늘날 단속사의 가람은 찾아볼 길 없지만 석탑과 초석만이 남아있는 단속사 터에는 양화소록이 전한 매화가 해마다 화사한 군자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산청 3매 중에서 으뜸인 남명매가 있다. 칼 찬 선비였던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이 61세 때 산천재 앞뜰에 심은 것이다. 연분홍빛과 흰색 겹꽃이 황홀하다 못해 올곧은 남명정신이 물욕에 쪄든 현대인의 등짝을 때리는 듯하다. 이황(1501~1570) 선생은 매화 화분을 앞에 놓고 술벗을 하다 말년에 병들어 눕게 되자 매형(梅兄)에게 누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다며 화분을 다른 방으로 옮긴 후 눈을 감았다. 얄팍한 지식 한 장으로 세상에 출사해 입으로는 천리를 말하며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드는 지금의 위정자들은 곳곳에 활짝 피어 있는 매화의 군자상(君子像)을 보며 자신의 참 모습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