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대구는 3·1운동 당시 서울 부산 원산을 잇는 교통의 중심도시이며 상업 거점 도시이기도 하다. 오늘의 대구의 달성공원, 두류공원, 망우공원, 앞산공원에는 허위, 이상룡, 이상화, 우재룡, 이상설 등 항일 독립지사들의 기념비와 공적비가 즐비하다. 팔공산은 한말 산남의진의 본거지이며 앞산 안일사는 조선국권 회복단이 창립된 곳이다. 대구의 도심 곳곳에서는 항일 지사들의 생가, 집터, 유적 등이 있다. 대구 계성학교의 아담스관은 독립선언문을 등사한 곳이고 서문시장은 만세 운동의 시발점이다. 대구의 제일교회와 남산교회는 만세운동의 산실이며 보현사 역시 태극기를 제작한 곳이다. 현 삼덕교회의 자리인 대구형무소는 애국지사들이 고초를 받고 순절한 곳이기도 하다.

대구가 독립운동의 성지라고 불리는 것은 항일운동의 지사들이 많기 때문만은 아니다. 대구는 일제의 강제 병합 후 자발적인 항일운동 결사체가 많이 창립되었다. 대구는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자랑스러운 도시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일제는 한반도의 경제적 수탈을 위해 이 나라에 차관을 강요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에 대해 빚을 갚기 위한 민간 운동이다. 대구 광문사(수창초등학교 뒤) 사장인 김광제와 서상돈 등 13인은 나랏빚 1천300원(당시 우리나라 1년 예산)을 갚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금연과 금주를 통해 개인이 매달 20전씩 헌금하자는 운동이다. 여러해 전 대구에는 국채보상공원이 조성되고, 국채보상운동이 유네스코 세계 기록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대구의 자랑이다.

대구 달성공원에서는 3·1 운동 4년 전인 1915년 독립무장단체인 대한광복회가 창설되었다. 조선 8도에 지부를 둔 항일 비밀 무장 조직인 셈이다. 이 조직은 대구 앞산 안일사에서 창설된 조선국권회복단과 풍기에서 결성된 광복단을 통합한 전국적 조직이다. 총사령 박상진, 지휘장(참모장) 우재룡, 권영만 지사는 만주의 지부(길림광복회 김좌진 장군)까지 두었다. 이들은 조선 국권 회복을 위한 과감한 의혈 투쟁을 전개하고, 만주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자금도 모금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조세 운반 마차를 습격하여 자금을 조달하기도 하고, 친일 부호 장승원 등을 처단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대구의 3·8 만세 운동의 위세도 대단하였다. 이날 1919년 3월 8일 오후 2시 대구 서문시장(현 섬유회관 건너편)에서 출발한 만세 시위는 중부경찰서를 지나 종로와 약전골목, 중앙 파출소를 거쳐 현 대구백화점(당시 달성군청)까지 계속되었다. 거사 당일 기독교인 이만집 김태련이 선언문을 낭독하고, 당시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선생과 학생들이 선도하고 대구고보(현 경북고)학생 200명이 가세하여 1천여 명이 만세 시위에 가담하였다. 이후 4월15일까지 한 달여간 의성·청송·안동·예천 등 경북 각지에서 84회에 걸쳐 2만8천여 명이 참여하였다. 일본 경찰과 군인들은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주모자와 가담자 3천296명은 체포 감금되어 옥살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대구는 항일 운동 본산으로 항일 독립 운동의 성지라고 불릴 만하다. 대구 신암 선열공원에는 독립 애국지사 52명이 나란히 누워 있다. 이러한 대구의 항일독립 정신은 1960년 대구 2·28 학생 민주 운동으로 부활되고, 4·19 혁명 정신으로 이어졌다. 대구는 한때 한국의 모스크바라 불릴 정도로 진보 세력의 중심 무대가 된 적도 있다. 대통령 후보 조봉암이 이승만을 누른 것도 이곳 대구이다. 대구는 전통적인 정의와 의혈의 DNA를 간직한 도시임에 틀림없다. 그러던 대구가 수구 보수의 도시가 되어버렸다. 3명의 수구 대통령을 배출한 때문일까. 여하튼 대구에 사는 시민들은 항일 성지라는 역사적인 자부심부터 가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