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은 아이들이 듣는 음악을 저급하게 생각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평가절하한다. 그런데 음악은 하나의 취향이다. 취향은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받아야 할 어떤 것이다. ‘구별 짓기’가 정말 인간의 본능이라면 우리는 구별하는 일을 막기보다는, 구별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그 때 세대 간의 갈등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옷의 기능

옷은 ‘구별 짓기’의 본능을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 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키톤(Chiton)’이라고 불리는 옷을 입었다. 옷이라고 했지만, 몸에 천을 두르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당시의 기술로는 그 정도의 천마저도 생산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도 생산이 까다로운 모직물이나 비단은 고대사회에서는 더욱 생산이 어려웠을 뿐 아니라 귀하고 비쌌다. 그러니 이런 옷은 한정된 일부 계층의 사람만 입을 수 있었을 것이다.

로마시대 원형경기장으로 가보자. 이곳에서는 검투시합이 벌어지곤 했다. 시합이라고 했지만 거의 살육에 가까웠다. 싸움이라고는 해 본 적 없는 죄수에게 칼을 주고, 잘 훈련된 군인과 싸우게 했기 때문이다. 죄수는 대부분이 사형수였는데 소매치기, 좀도둑, 생계형 범죄자도 사형수가 되는 시대였다. 그러니 이들이 싸움을 잘 할 리 없었고, 전문적인 검투사와 싸워 이길 가능성도 매우 낮았다.

검투시합을 보기 위해 원형경기장에 사람이 몰렸다. 사람들은 자신의 계층과 신분을 드러내는 옷을 입었다. 일반적으로 남성은 무릎까지 닿는 블라우스 형태의 ‘토니카(Tonica)’를 입었다. 그리고 로마의 시민만 토니카를 휘감는 ‘토가(Toga)’를 입을 수 있었다. 옷의 색과 천도 계층마다 달랐는데, 귀족은 린넨이나 흰 양털로 된 옷을, 그 중에서도 원로원 의원은 넓고 붉은 줄이 있는 토니카를 입었다. 기사 계급은 자주색 장식을 착용할 수 있었고, 평민이나 노예는 조잡하고 어두운 색의 옷을 입어야 했다. 신발도 신분에 따라 달랐는데, 귀족은 붉은색이나 주황색 샌들을 신었고 원로원 의원은 갈색 신발, 집정관은 흰색 구두를 신었다.

△‘구별 짓기’의 진화

왜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서로를 구별 지으려 하는 것일까? 옷을 통해 신분이나 계급을 구분하려 했던 흔적은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다. 가까운 예로 조선시대 사람은 모자(갓)의 크기나 모양으로 신분을 구분했다. ‘구별 짓기’의 방법으로 모자를 선택했던 이유는 눈에 가장 쉽게 띄기 때문이다. 과거로 가면 갈수록 구분의 방법은 직접적이고 노골적이 되지만, 현대사회로 오면 그러한 구별은 보다 간접적이고 은밀한 방식으로 이뤄진다. 그런 점에서 ‘구별 짓기’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온 오랜 진화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학생들 사이에는 눈을 강조하는 스모키 메이크업(smokey makeup)이 유행하고, 여학생은 교복 치마의 길이는 물론 폭까지 줄인다. 남학생은 바짓단을 최대한 줄여서 입는다. 그 극단에 ‘7통 바지’가 있다. 바지통이 7인치, 17.8㎝밖에 되지 않아 발목이 드러나도 이런 바지를 선호한다.

어른은 그런 아이들을 이해하지 않는다. 어른은 아이돌의 노래와 춤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요즘 노래는 노래도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말은 누구나 어른이 되기 전 많이 들어본 것이다. 언제? 당신이 학생이었을 때, 당신을 학생이라고 부르던 어른들로부터 듣던 이야기다.

세대 간에 격차가 있고, 그 세대만이 공유할 수 있는 음악이 있고, 패션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취향’이라고 부른다. 이에 대해 깊이 있게 천착한 사람은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1930∼2002)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취향은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이다. 인간과 사물,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의미할 수 있는 모든 것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사람은 스스로를 구분하며, 다른 사람에 의해 구분된다.”

△아비투스

과거에는 가문을 중심으로 사람을 구분했다면 오늘날은 문화와 취향에 따라 서로를 구분한다. 편의상 취향이라고 했으나 부르디외는 이것을 ‘아비투스(Habitus)’라는 이름으로 개념화했다. 부르디외는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의 많고 적음에 따라 사람들의 계급과 계층을 구별하고 있다. 상류층 혹은 고급 취향의 사람은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이 많은 부류일 것이다. 이와 달리 경제자본도 적고, 문화자본도 적은 부류는 하층민으로 분류될 것이다.

그렇다면 보편적인 것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훌륭한 예술 작품은 보편성을 가지고 있어서 아무리 무지한 사람이 보더라도 그 작품의 우수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세대와 계급과 계층 속에서 사람은 저마다 다른 취향을 가지고 태어난다. 힙합을 듣는 이에게 딱딱하고 웅장한 바흐나 베토벤과 같은 클래식이 귀에 찰리 없다.

젊은이들은 자기가 듣는 음악을 이해해 주는 어른과 그렇지 않은 어른을 구분한다. 후자를 ‘꼰대’라 부를 것이다. “어떤 음악, 어떤 영화를 좋아하세요”라는 물음은 단순히 상대방의 취미가 무엇인지 묻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대답을 통해서 상대방의 사회적 위치와 교육 환경, 나아가 계급이나 계층적 위상을 확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과 대중가요를 좋아하는 사람은 다른 사회적 위상을 가졌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당구가 취미인 사람과 승마가 취미인 사람의 경제적 수준에서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 음악이 어떠세요,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 음악의 좋고 나쁨을 따지기 전에 그렇게 묻는 사람이 어떤 계급이나 계층에 속해 있는지를 살피면 그 사람의 취향을 읽을 수 있고, 그 사람이 원하는 대답에 더 가깝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타인의 취향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를 통해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고급하고 품격이 높은 문화가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낸 하나의 취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별 짓는 행위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구별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 그것이 잘못이라는 점을 그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역사는 옷이 민주화되는 쪽으로 전개된다. 어떤 것을 고급하다고 규정짓는 집단은 정치적, 사회적 헤게모니를 쥔 사람들이었다. 귀족과 왕족이 그런 사람이다. 하지만 사회가 분화되고 더욱 복잡한 단계로 발전해 나가면서 다양한 취향이 생겨나게 되었다. 사회가 성숙하게 발전하면서 취향을 고급한 것과 저급한 것으로 나누어 그것의 가치를 평가하지 않고,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는 쪽으로 발전해 가고 있다. 이를테면 바로크 시대와 로코코 시대는 화려한 의복을 자랑하는 시대였다. 현란한 레이스가 달려 있고, 치마는 풍성하며, 옷색깔은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옷을 통해 자신의 부를 과시했고, 이를 통해 다시 명성을 쌓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