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길수<br>​​​​​​​수필가
강길수
수필가

입춘 지나고 세 번째 날이다. 산 너머 남촌의 꽃바람이 그리운 마음을 하늘도 아는 지, 따사한 날이다. 삼년 째 벼르던 주인공을 이주를 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어제 설날, 고향에 다녀온 노곤(路困)이 다 가시지는 않았으나, 오전까지 쉬었으니 됐다. 작년과 재작년에도 주인공을 치우자는 아내의 주장에, 날씨를 구실삼아 미적거리며 내심 이주시키지 않으려 했었다. 그만한 연유가 있는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필요한 도구를 챙겨들고 나서며, 아내에게 함께 가지고 했다. 피곤한지 내키지 않아 한다. 힘들어도, 마음먹은 김에 해야 한다고 말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아파트 뒤 자그마한 텃밭이다. 지난 여름 강풍에 비스듬히 쓰러진 주인공을 바로 세우려, 아내가 담장너머 큰 향나무에 매단 끈을 풀었다. 가지 끝엔 아직도 주인공의 분신 몇 개가, 빨간 자태를 뽐내며 까치밥으로 제 몸을 내놓고 있다.

주인공을 마주한다. 자신을 이주시키려는 내 속을 알 텐데도, 반갑게 맞는 것만 같다. 수십 년 된 옆 향나무만큼이나 키가 커지고, 밑동은 내 팔뚝만하다. 지난해는 앙증스런 토종대추가 많이도 열렸었다. 속말로 인사한다.

“우리 주인공아, 잘 있었니? 미안하다! 나와 연 맺어 숱한 고생만 하고, 생사기로도 세 번씩이나 넘긴 너다. 오늘, 네 몸을 동강내어 세 번째로 이주시키려 한단다. 슬프고 아프더라도, 이해하고 참으며 받아주기 바란다. 그래야 네가 살고 또, 우리 차로 옮길 수 있기 때문이란다.”

톱으로 주인공의 몸, 첫가지 위를 자른다. 단단한 나무라 톱질이 더디다. 젊은 향내가 퍼진다. 한참 후, 줄기는 두 동강이 났다. 윗부분의 잔가지와 줄기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묶는다. 설거지를 마친 아내도 나왔다. 나머지 잔가지 정리를 그녀에게 맡기고, 삽으로 땅을 파기 시작한다. 뿌리가 드러나자, 깜짝 놀랐다. 두 번째 이주 때 보다 훨씬 큰 똬리를 틀고 있어서다. ‘내가 잊고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핑 돌았다. 자태가 가부좌 한 사람의 아랫도리 같기도 하다.

처음 만나던 모습이 떠올랐다. 세 번째 직장의 어느 여름날, 화단 가장자리 콘크리트의 틈새에서 방긋방긋 웃는 연록아가를 만났다. 갓 돋아난 주인공, 토종대추나무새싹이다. 이태쯤 지났을까. 연록아가는 몸이 제법 굵어지고, 무릎위로 오를 만큼 자라나 새싹어린이가 되었다. 그냥 둘 수 없어, 집에 데려다 관상용으로 키우자고 결정했다. 그해 늦가을, 큰 플라스틱 화분에 새싹어린이를 첫 이주시켰다. 거처는 집 베란다다. 주인공에게는 고생 끝, 내게는 즐거움 시작이라 믿었다.

다른 대추나무보다 일찍 잎 나고, 꽃 피고, 열매 맺었다. 줄기 수도 늘었다. 몇 해 지나자, 베란다에서 감당할 수 없이 커져 새싹소년이 되었다. 보다 못한 아내가 내 반대를 무릅쓰고, 틈을 타 화분을 베란다 밑 코크리트 바닥으로 옮겼다. 나는 물주기 담당을 자청했다. 하지만 다음 두 여름동안 물주는 일을 게을리 해, 새싹소년은 세 번씩이나 생잎이 말라죽는 변을 당하고 말았다. 마음이 억새 잎에 베인 듯 아팠다. 물을 주자, 죽은 줄 알았던 새싹소년은 그때마다 눈부시게 되살아나 짜릿한 기쁨을 선물했다. 몸을 살리려 제 생명을 바친 푸른 잎들은,‘내가 죽어야 다른 이를 살린다!’는 근본메시지를 가슴에 아로새겨주었다. 언제부턴가, 몸이 튼튼해지며 청년이 되어갔다. 살펴보니 뿌리가 화분의 물 빠지는 구멍을 빠져나와, 콘크리트 틈새를 파고들어 땅에 깊이 내리고 있는 게 아닌가. 이 일로, 주인공을 아파트 뒤 작은 밭으로 두 번째 이주를 시켰다. 그때 드러난 뿌리는, 화분을 몇 바퀴씩 휘돌아 똬리가 되어있었다. 삶의 처절함은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명에게 있나보다.

춘분 뒤 삼세번 째 날, 주인공 이주를 근교 양지바른 우리 밭두렁에 잘 마쳤다. 따져보니, 주인공의 삶이 공교롭게도 겨레를 닮아 삼세번과 연이 깊다. 부디 삼세번 째 이주로, 우리 주인공, 대추나무새싹청년이 영주(永住)하고 번성하기 빈다. 우리 집이 삼세번 째 이사로, 내 집을 마련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