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휘논설위원
안재휘 논설위원

윤흥길의 ‘완장’은 권력의 횡포가 심한 우리 사회를 풍자한 대표적 소설이다. 무위도식하며 건달로 살다가 보잘것없는 저수지 감시인으로 채용된 ‘임종술’은 완장을 차고 으스대며 행패를 부린다. 낚시질 온 도시의 남녀들에게 기합을 주기도 하고 고기를 잡던 초등학교 동창 부자를 폭행하기도 한다. 그러다 결국 자신을 고용한 사장 일행의 낚시까지 단속하다가 해고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완장을 차고 저수지 지키는 일에 몰두한다.

기형적으로 성장해온 이 나라 포퓰리즘 민주주의의 행태가 기가 막힌다. 이제는 다 잦아든 줄 알았던 ‘동남권 신공항’ 망령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놀랍게도, 10여 년 만에 가까스로 잠재운 영남권 지역갈등의 막장드라마를 다시 무대에 끌어올린 이는 대통령이다.

문 대통령은 부산사람들 앞에서 “부산·울산·경남의 타당성 검증 결과를 놓고 5개 광역자치단체의 뜻이 하나로 모아지면 결정이 수월해질 것이고, 만약 생각이 다르면 총리실에서 검증 논의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업이 표류하거나 지나치게 늦어져서는 안 된다”는 가속페달까지 덧붙였다. 바로 읽으나, 뒤집어 읽으나 ‘가덕도 신공항’ 건설에 목을 맨 부울경(부산·울산·경남) 단체장들에게 힘을 실어준 발언이다.

그래놓고, 청와대는 “아무것도 결정된 바 없다”는 따분한 해설만 거듭한다. 5개 광역단체의 뜻이 하나가 아닌 것을 뻔히 알면서 ‘총리실’은 왜 동원하는가. 5개 단체가 합의되지 않으면 그만두면 될 일이다. 수많은 논란과 갈등과 소모전을 치른 끝에 겨우 봉합한 이슈를 단지 정권이 바뀌었다는 이유 하나로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바꿔도 되는 건지 참으로 궁금하다.

온 국민이 ‘신공항’ 건설을 지역발전의 도깨비방망이로 여기게 만든 것은 득표를 위해 ‘국익’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내팽개친 뭇 정치인들이다. 문 대통령은 민주당 대표 시절에 “부산에서 5석만 더민주에 주면 박근혜 정부 임기가 끝나기 전에 신공항을 착공하겠다”고 말했다. 예타(예비타당성심사)면제 사업으로 결정된 ‘새만금 국제공항’도 문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발표한 다음 전북권 10명의 국회의원들이 발 벗고 나선 결과물이다.

외국의 전문가들은 좁은 국토에 공항 유치경쟁에 날 새는 줄 모르는 우리네 풍토를 비웃는다. 기존 국내공항들만 해도 이미 골칫덩어리다. 경제 논리가 아니라 철저히 정치 논리로 만들어진 결과다. 현재 우리나라엔 국제공항 8개와 국내공항 7개 등 모두 15개 공항(군용공항 제외)이 있다. 지난해 전국 10개 지방공항의 적자를 모두 합친 금액은 무려 797억 원이다. 지방 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이라 개선의 여지도 적다. 지난해 최악의 적자를 낸 무안공항은 텅 빈 활주로에 인근 주민들이 수확한 고추를 말리는 장면으로 화제가 돼 ‘고추 말리는 공항’으로도 유명하다.

‘신공항’ 경쟁은 나라 말아먹을 병폐다. 4대강 사업을 질타하며 정부의 토목공사를 죄악시하던 문재인 정권이 느닷없이 ‘가덕도 신공항’에 힘을 실어주는 모습은 어이없는 반전이다. 경제정책 실패를 만회할 방안으로 그토록 경멸하던 ‘토목사업’을 답으로 찾아내어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지방을 다니며 토목 공약을 더 퍼부을 심산이라면 참 서글픈 일이다. 정권이 바뀔 적마다 나랏일을 뒤집어엎는 국가에 무슨 미래가 있을까.

소설 ‘완장’에서 기고만장한 종술에게 ‘완장의 허황됨’을 일깨워주는 사람은 뜻밖으로 술집 작부 부월이다. “눈에 뵈는 완장은 기중 벨볼일 없는 하빠리들이나 차는 게여!” 그녀의 일갈은 전율을 부른다. ‘국익’을 팽개치고 완장질에 여념이 없는 우리 정치권을 향해 제대로 된 권력의 지혜를 가르칠 부월은 정녕 없는가. 권력은 마구 휘둘러 뒤집어엎는 게 아니라, ‘공감’하는 정책으로 나라의 미래를 개척하라는 계시임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