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입춘 날 들에 나가/ 봄까치꽃 핀 걸 본다// 몸 낮추고 눈 맑아야/ 겨우 찾아 보이는 꽃// 그 곁에 쪼그려 앉아/ 봄소식을 듣는다” - 拙詩 ‘봄소식’

입춘이 지났지만 들녘은 아직 겨울입니다. 지난 여름의 무성한 초록과 가을의 황금물결은 다 어디로 갔는지 메마르고 삭막한 무채색의 풍경입니다. 그 풍경 속으로 자주 산책을 나갑니다. 산책하기에는 산속 오솔길도 좋지만 사방이 탁 트인 들길이 더 좋습니다. 경정리로 곧게 뻗은 들길은 걸음걸이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걷다보면 누워있거나 앉아 있는 것보다도 몸과 마음이 더 편안하고 자유롭습니다. 아마도 흐르는 물에 몸을 맞기고 떠내려가듯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흘러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논둑길 양지쪽에는 혹한에도 얼어 죽지 않고 월동하는 풀빛이 있습니다. 풀들은 대개 씨앗을 남기고 죽거나 뿌리만 살아서 월동을 하지만, 최소한의 조건만 되어도 산 채로 겨울을 나는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일견 황량한 겨울 들판에도 귀 기울이면 인동하는 생명의 숨결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둑길 밑 검불 사이로 적갈색이 된 풀잎이 보입니다. 쪼그리고 앉아 들여다보다가 오소소 소름이 돋습니다. 놀랍게도 봄까치꽃이 피어 있습니다. 아직은 한파가 더 닥칠지도 모르고, 벌 나비가 날기에도 한참이나 이른 계절인데 왜 하마 꽃을 피운 걸까요. 세상에 무의미한 존재나 현상이란 없을진대, 얼핏 보아서는 무모하고 부질없어 보이는 이 봄까치꽃도 분명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가 있을 테지요.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경기가 어렵다고 아우성입니다. 갈수록 실업자가 늘어나고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불평과 원망을 넘어 증오와 적개심이 팽배한 사회입니다. ‘헬조선’이라는 말까지 나돌지만, 그러나 내가 보기엔 대한민국은 상당히 풍족한 나라입니다. 시래기죽으로 연명하던 시절에 비하면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가깝지요. 세계 십위권의 경제대국답게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 굶어 죽거나 얼어 죽을 염려는 없는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행복지수는 낮고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가장 높다고 합니다. 과분한 욕심을 분모로 놓는 한 물질적 소득이 행복지수를 높이지 못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비관하거나 좌절하는 이유 중 대부분은 상대적 박탈감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처지가 남들에 비해서 열악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생존의 문제가 걸린 절대적인 조건은 아닙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극복이 가능한 열등감이기 때문이지요. 나보다 잘나고 많이 가진 사람들과 구태여 비교를 하지 말고 부러워하지도 않으면 그만이니까요. 겨울 들판에 피어있는 봄까치꽃이 매화나 동백에 비교하여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지요.

의식주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받지는 않는 나라에 산다는 건 대단한 행운이자 축복입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최소한의 의식주도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고, 인류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어떤 생명체도 의식주에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생태계의 법칙이니까요. 백수의 왕이라는 사자나 호랑이도 쉽사리 먹잇감을 얻을 수 없는 것이 자연의 공평한 섭리입니다. 남보다 가진 것이 적다는 것은 결코 기죽고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필요 이상의 탐욕이 자신과 지구생태계를 해치는 일이라는 각성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상대적 박탈감 따위로 좌절하거나 자괴감을 갖는다는 건 한갓 어리석은 엄살에 불과합니다. 생명은 사는 데까지 살아있는 것으로 완성이고 희열이기 때문에, 생명현상 그 자체를 우선하는 명분이나 목적이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몸을 낮추고 눈이 맑아야 찾을 수 있는 곳에 남들과 비교할 수 없는 생명의 기쁨이 있습니다. 저 겨울 들판의 봄까치꽃이 전하는, 어떤 경전의 말씀보다도 더 생생한 전율로 다가오는 메시지입니다.